주제설교 009 고난 01 벧전 4.1-6, 12-16 고난의 목적
2025년 9월 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인간은 아무도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의 연약함과 무지함 등 인간이 가진 한계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20~30대에 많은 어려움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원인을 돌아보니 다 제가 연약하고 무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로 저를 힘들게 한 것은 인간관계의 고통이었습니다. 밖에 있는 관계보다 가까운 관계로 인한 상처와 스트레스가 크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그렇듯 가족에게 가장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가족 때문에 가장 힘들었습니다. 이것은 관계에 대한 친밀함의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힘들었던 것은 제가 원함은 큰데 이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훨씬 더 똑똑하고 능력이 많고 돈도 많고 남보다 잘하고 싶었는데 그 때마다 그것들을 이룰 능력이 제 안에 부족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건강이 약해서 걸림돌이 된 것도 괴로움의 이유였습니다. 태생적으로 약했던 몸은 20-30대 때 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네 번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습니다. 안정감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통제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2-30대에는 내일은 어떻게 될지, 십년 뒤는 어떻게 되지 불안한 생각을 할 때마다 폭풍 가운데 흔들리곤 했습니다.
또한 이 모든 것 못지 않게 힘들었던 것은 제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정적 감정이었습니다. 제 안에 나쁜 감정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집안이 무너지고 상황이 바뀌자 우울하고 화가 나고 낙심되는 등 쏟아져 나오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외적인 상황이 어려웠지만 비슷한 상황에 놓인 모든 사람이 저처럼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너무 예민하고 약했기 때문에 상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시기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예수를 잘 믿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던 우리 가정을 왜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되고 빠져나올 수 없던 쳇바퀴를 십 년 넘게 보내고 난 한참 후에야, 하나님은 무조건 행복과 평안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 시리즈는 제 과거가 많이 묻어난 시리즈가 될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성경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과 고난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고난 시리즈 첫 번째 시간에는 고난의 목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난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1.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vv.1-6
그렇다면 고난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a]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
고난을 얘기하며 왜 예수님의 육체의 고난을 이야기하나요? 이 곳의 육체는 단순히 몸이 아닙니다. 이는 ‘사륵스’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으로, 영과 분리된 인간의 전 존재적 육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육신’은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까지 포함한 육체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이 당하신 육신적 고통만이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비난, 공격, 멸시를 받으시며 당하셨던 내적인 상처, 아픔, 또한 버림 받고 배신당한 깊은 고통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통 받으셨다고 먼저 이야기한 이유는 1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1b] …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
고난이 닥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반응은 ‘왜 내가?’입니다. 왜 내가 암에 걸렸지? 왜 나한테 나쁜 일이 벌어지지? 이는 마음의 갑옷을 준비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왜 내가’의 안에는 ‘나는 고난 받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특별하다, 나는 잘 살았다’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다, 네가 고난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자세가 마음의 갑옷이라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다니 이해할 수 없다’라고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말로 교만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고난을 겪습니다. 예수님도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셨는데 우리들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고난이 필요한가요? 1절 하반절을 보시면
[1c] …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우리 안의 육신은 계속해서 죄악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불어 닥치는 불안, 두려움, 미움 등을 하나님이 갑자기 어느 날 성령으로 없애주신다면 좋겠지만 이것은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착각입니다. ‘육신’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이룬 나의 존재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불안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셔서 예수님처럼 되게 하셨다면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나라는 육신에는 육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생각해 온 나의 생각, 내가 받은 상처, 내 연약함 등의 총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어서 새 생명을 얻었지만 문제는, 새 생명이 아직 너무 약한데 육신은 강력하게 우리 안에 존재하면서 우리는 이중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다고, 나이가 든다고, 목사라고, 무조건 성숙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변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한데, 그 조건이 바로 고난입니다. 2절 상반절에 고난의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2a]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
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기에 죄의 근원 자체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항상 정욕이라는 결과물을 남깁니다. 죄는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된 상태라 영적으로 공허하다 보니 반드시 자기 중심적 정욕을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의 죄는 볼 수 없지만 그 사람이 욕심내는 영역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이 강하면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마음대로 안 되면 화를 내고 비난합니다. 지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실 텐데, 그렇게 남을 떠올렸다는 자체가 죄입니다.
죄를 발견한다는 것은 마치 거울 없이 자기 얼굴을 보듯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는 절대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것이 방어 기제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니라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것인데 인간은 절대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뇌의 구조가 만들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자기 자신을 떠올리셨다면 여러분은 은혜 충만한 분이십니다.
죄인은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공허하니까 자기 욕망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나 고난이 임하는 것입니다. 누구한테요? 예수를 따라가는 인생에게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인도하시는 고난입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습니다. 관계의 고난이 한 사람에게는 죽음과 같고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돈이나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고난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내실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임해서 우리가 고통스러우면 우리는 결국 내 욕망을 추구하고 정욕이 지배하는 채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내 정욕이 만들어내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2절 하반절에
[2b] …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전에는 돈 쓰고 시간 쓰고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결정을 했습니다. 잘못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고난이 임해 더 이상 욕심대로 살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3절은 고난을 겪지 않은 인생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뜻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방탕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육적 쾌락을 위해 음행하고 방탕할 뿐이고 그 결과는 자기파괴 이웃파괴입니다.
위의 목록은 대단히 타락한 소수만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기회가 주어지고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일 것입니다. 왜 이렇게 쾌락을 열망하나요? 쾌락에 대한 우상이 그를 지배하기 떄문입니다. 내 은밀한 욕망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또한 세상이 다 이렇게 살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면 4절처럼 비방합니다.
[4]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ㅠ
제가 대학을 들어갔는데 모든 모임이 술집에서 있었는데 선배들 동기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매일 따라다녔습니다. 따라는 가는데 술은 안 먹겠다고 하니까 욕도 많이 먹고 유별나다고 찍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욕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두시간만 지나면 다 취하고 저만 멀쩡하니까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벽 붙들고 우는 사람, 음담패설 늘어놓는 사람, 했던 말 또하는 사람, 토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끌어다가 택시 태워 보내고 심지어 택시비까지 내주기를 한 달을 하고 나서 다시는 그런 모임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다들 미쳐가는데 멀쩡한 채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내가 싫어서 그렇게 술을 먹이려고 했구나 느꼈습니다.
35년 전의 기억 이후로는 그런 미친 모임에 속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세상에 살며 끊임없이 유혹과 질타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왜 너만 잘난 척해, 왜 너만 멀쩡해, 왜 너는 우리처럼 되지 않아? 압박하지만 결국 그들은 그러다 실수하고 방탕에 사로잡혀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게 됩니다.
술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도 못 끊는 것 한 두 개 쯤은 있을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유튜브 그만 봐야지 그만 봐야지 하면서 끊지를 못합니다. 담배, 게임, 커피, 디저트, 자신만이 아는 영역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욕망에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그까짓 술, 담배, 커피, 넷플릭스 끊으라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 아닙니다. 그것들을 지배하는 영혼의 깊은 죄를 건드리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사소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냐면 겉으로 드러난 그 정욕이 우리의 깊은 공허한 영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전반적으로 인도하셔서 결국 우리 영혼이 죄를 떠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가 되게 만들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5절입니다.
[5]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세상 사람들이 방탕하게 사는 이유는 심판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끝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오시는 심판만이 아니라 각자에게 주어진 죽음이라는 심판을 말합니다. 그래서 6절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육적으로 심판을 받아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복음을 들었던 분들이 이 땅의 심판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이 잘못해서 혼나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판은 영어로 judgment 인데 이것은 한글로 번역할 때 판결, 재판, 판단이라고 더 자주 번역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심판이라고 할까요?
인간 재판관은 사형 선고라고 판결하고 직접 집행하는 경우는 없으나, 하나님은 판결하고 심판까지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라는 기준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온전한 사랑으로 가득 차신 예수라는 기준으로 우리를 보시면 자기 정욕을 위해 살고 방탕한 모습이 예수 밖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와 맞지 않는 부분들을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잘라가십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육신은 계속 잘려나가게 되고 그 끝은 육신적 죽음입니다. 고난을 통해 인생을 지배하던 육적 영향력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6절 하반부 말씀처럼, ‘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2.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vv.12-16
두 번째로 고난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고난을 불시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연단의 과정이 우리를 순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순수하게 존재하는 금속은 없습니다. 연단을 해야 합니다. 1g의 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1100도, 1200도의 용광로에서 녹일 때 20톤에서 30톤 정도의 부산물이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전에 왜 그렇게 많이 울었을까요? 상황이 고통스러운 것도 있지만 기도할수록 제 영혼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고 두려움, 불안, 분노, 미움, 악에 받친 더럽고 추한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으로 우리를 연단하여 그리스도처럼 만들기 원하십니다. 13절입니다.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들어가는 고난입니다. 불순물이 가득한 채로 끝나면 연단이 아닙니다. 금을 만들려는 사람이 용광로를 확인했을 때 여전히 불순물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셔서 불순물을 다 태워버리고 순금만 남도록 인생을 인도해 나가십니다. 그 본질은 새 사람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 14절입니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21세기 한국에서의 고난은 대부분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지만 이 편지를 받는 베드로의 성도들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위해 고난을 당하면 영광의 영이 지금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과 모습을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지만, 예수를 위해 고난 당하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우리를 통해 나타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의 죽음입니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본질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용서해 달라고 하며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위해 고난을 당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대신 예수를 위해 고난을 당하지 못할지언정 이렇게 살지는 말라고 15절에 경고합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여기서의 ‘간섭’은 밀고하거나 남의 일에 끼어들어 욕망을 취하려는 사기를 뜻합니다. 15절은 전부 범죄 행위를 말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하고 성경은 16절에 약속을 줍니다.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혹시라도 우리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회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허용된 이유는 우리의 죄를 잘리고, 우리가 고난을 통해 순결하게 되어 예수처럼 변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혹시 예수를 위해 고난을 당하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 이 목적을 기억하고 기도하심으로 고난을 잘 이겨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