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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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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짝단어 04 룻 4.1-22 선한 영향력으로 연합을 이루다

2026년 9월 27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오늘은 성경 짝단어 룻기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룻기 한 권을 네 장으로 나누어 서로 연결되는 두 단어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제 4장에서는 앞선 세 장에서 배운 내용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박보검이라는 남자 배우를 아시나요? 저는 잘 모르던 배우였는데,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음악 프로그램도 진행했는데, 제 아내가 워낙 좋아해서 계속 칭찬하고 보여줘서 좀 더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특히 드라마를 함께 찍은 아이유가 방송에 나와서 박보검을 많이 칭찬하면서 더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아이유와 박보검이 동갑이랍니다. 그런데 아이유는 박보검이 자기보다 훨씬 어른스럽다고 했습니다. 촬영 중에 자기도 힘들 텐데 다른 사람을 먼저 챙겼다는 것입니다. 일이 힘들어서 회색빛이 돌던 촬영 현장에 박보검이 오면 분위기가 봄이 온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는 아주 우직하고 성실하고 열심이 있는 사람이래요.


그래서 이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에 관식이라는 남자 주인공이 딱 그런 캐릭터인데요. 그 관식이가 바로 박보검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드라마의 관식이는 거의 예수님 급이거든요.


그리고 아이유는 누구라도 박보검과 작품을 찍으면 다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박보검이 신앙이 있는 연예인이에요. 그런데 아이유는 신앙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주변에 이렇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신앙인인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불신자일지라도 이렇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과 계속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악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과는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고요. 저희도 자녀들에게 그런 사람은 멀리하라고 가르치죠.


자, 이것을 저희가 보던 표에 적용해 보면요. 자기중심적인 죄에서 구별된 하나님과 이웃 중심적인 거룩한 사람이 참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연합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냥 연합하는 게 아닙니다.


아이유가 박보검에게 그런 것처럼, “와, 내가 이 사람과 함께해 보니까 이런저런 선한 모습들이 있었다.”라고 그 사람이 행한 선한 일들의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증거의 내용은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 전체를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선한 영향력으로 연합한다고 할 때 증인과 찬양이 함께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자기중심적 사랑을 하려는 사람은 악한 결과를 내고 분열을 만들어 내는데요. 여기서는 참소하는 자가 생깁니다.


참소는 남을 헐뜯으며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저런 악한 모습 때문에 화가 납니다. 짜증이 납니다.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참소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아무리 맞는 말일지라도 남을 비방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증인의 반대는 참소하는 자, 찬양의 반대는 비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선한 영향력이나 악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요. 그 결과로 연합을 하거나 분열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이 표가 그 영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희가 룻기 1장에서부터 이 개념들을 쭉 살펴봐 왔는데요. 마지막 4장에서 바로 이 선한 영향력으로 연합을 이루고, 그 가운데 증인들이 선한 행위에 대한 증거를 하고, 찬양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합을 이루는 선한 영향력이란 무엇인가요?

1.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3장에서 룻은 타작마당에서 자고 있던 보아스에게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보다 먼저 기업 무를 책임이 있는 자와 이야기해 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룻의 제안이 아무리 선해 보여도 내 방식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우선으로 두는 보아스의 마음의 중심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그날 이후에 성문에서 그 친척이 지나가자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척의 이름이 ‘아무개’라고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재산에 손해가 될까 봐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으니까 그 이름을 족보와 성경책에서 지워버린 것일까요?


룻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흉년이 왔다고 하나님이 주신 땅을 팔아버리고 떠났다가 남자들이 모두 죽어서 저주를 받은 것 같아 보였던 엘리멜렉과 그 아들들의 이름들도 모두 나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룻기에서는 나오미도, 룻도, 보아스도, 그 어떤 이웃들도 그 엘리멜렉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아스도 이 친척을 보고 “네가 첫 번째 책임을 진 사람인데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느냐!”라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보아스가 이 젊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서 속으로 ‘거절해라, 거절해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지금까지 보아 온 보아스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아스가 너무나 섭섭해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 친척의 이름이 ‘아무개’로 나온 이유는 이 구절에서 이렇게 선한 일을 행한 보아스가 유명해지기를 찬양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아스와 아무개를 비교해 보면요. 유명의 반대 개념이 무명입니다. 보아스가 행한 일과 이름은 지금, 오늘도 기억되고 있죠. 아마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도, 그 후에도 기억될 것입니다.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과 가문이 영광을 얻습니다.


하지만 아무개는 그 이름이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의 이름을 드러내서 영원토록 그 이름과 가문에 수치를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영광과 수치가 반대 개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무개’로 이름을 가려준 것은 이 귀한 기회를 거절한 친척과 그 후손들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룻기 안에는 그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 헤세드가 가득 흐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보아스가 모형하는 다윗 왕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자기를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손 므비보셋을 아들처럼 아껴 주었습니다. 또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반하고, 왕궁에서 도망치게 하고, 압살롬이 자기 후궁들을 욕보였는데도 압살롬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울과 압살롬은 하나님이 정죄하고 심판해 주셨죠. 다윗은 정죄와 심판이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보며, 저들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권한도 가지신 강력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희의 허물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그 백성들과 이렇게 연합해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신명기 25장에서는 원래 죽은 자의 자손을 이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는 수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룻기에서는 그냥 신발을 벗어서 주는 형식을 통해 그 의무가 넘어갔음을 확실히 하면서 그것에 대한 확실한 증인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아무개도 공동체에서 축출되거나 끝까지 그 수치를 안고 살지 않았기에 공동체에 연합된 상태로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희는 룻기 4장을 묵상하면서 이 부분을 놓치기 쉽습니다. “아, 이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는 못된 사람이네. 그래도 잘됐다. 덕분에 보아스가 룻과 결혼해서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님이 오실 수 있었지.”라고 이 아무개를 업신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 아무개의 모습이 바로 저희들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면 그렇게 함부로 업신여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희는 내가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리는데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은 참 오래도 기억합니다. 배우자가 몇 년 전에 했던 말, 부모님이 나에게 상처 줬던 말, 형제자매가 나를 무시했던 일, 교회에서 누군가 나를 서운하게 했던 일은 날짜와 상황까지 기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생기면 과거의 죄까지 다시 꺼냅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때도 그랬잖아.” 허물을 덮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다시 꺼내 쓸 증거자료처럼 보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허물을 덮어주라고 한다고 해서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폭력이나 학대나 범죄를 감추라는 뜻도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 죄를 방치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죄는 필요하면 권면해야 하고, 공동체가 다루어야 할 죄는 다루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을 끄집어내서 헐뜯으며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라고 말을 해 주되 사람을 망신 주며 무너뜨리거나, 이 연합에서 끊어져 분열되지 않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망신을 줘서 그 행동을 고치려 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직접 심판하려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잘못된 말과 행동에 따르는 책임은 묻되 복수하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의 수치를 퍼뜨리며 “나는 저 사람과 같지는 않다.”라고 내 의를 세우지 않는 것이 지혜롭게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사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있나요?


“그 사람이 이런 선한 일을 했어요. 이런 좋은 점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 사람을 통해 이런 선한 일을 행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증인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을 칭찬하라고요? 그 사람은 잘못하는 걸로 칭찬할 것을 다 까먹는 사람이에요.”라고 그의 죄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달하는 참소하고 비방하는 사람인가요?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사람들 앞에 세워 놓고 “봐라, 이 사람이 얼마나 죄인인지.”라고 조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감당하지 못할 죄의 책임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셨습니다. 저희의 허물을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의 입과 혀는 예수님의 그 선한 행위를 증거하고 찬양할 수 있고, 나에 대한 이웃의 허물도 덮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다른 사람의 죄를 덮어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원래 너그러운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나의 더 큰 죄와 수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덮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희의 허물을 먼저 덮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로 이웃의 죄를 덮어 줌으로 저희가 속한 공동체가 참된 연합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합을 이루는 선한 영향력이란 무엇인가요?

2.이웃의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9절과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9절]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절]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첫 번째 기업 무를 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자 보아스는 자신이 그 책임을 다합니다. 바로 자신의 친척이자 같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땅과 자손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여기서 돈 많은 보아스가 기업 무름을 해 줬다는 사실만 기억한다면 이 은혜가 가진 무게를 잊기가 쉽습니다.


룻기에서는 이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유력하다는 것은 영적 능력뿐만 아니라 권력, 재력이 있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넓은 땅도 있고,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곡식도 많고,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도 베풀어 주고, 룻에게 곡식 꾸러미를 여러 번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쉽게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이렇게 부자니까 당연히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야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재산이 많은데 결정만 한다면 크게 부담되지 않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입니다.


저희가 부자에 대한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면 보아스가 베푼 은혜의 무게도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100만 원, 1,000만 원을 십일조하거나 기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진짜 부자들은 1원짜리 한 장을 쉽게 쓰지 않거든요. 저는 부자가 아니라서 그렇지는 않긴 하지만, 저의 큰할아버지가 조 단위의 부자세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재산을 당숙부, 당고모님들이 유산으로 받으셨습니다.


그 유산으로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의 이름을 합쳐서 장학재단을 만드셨는데요. 개인이 만든 장학재단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재단에서 매년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또 문화생활을 하기 힘든 학생들을 위해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해 주는데요. 거기에 그 재단 이름으로 된 홀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큰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저에게 하신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게 뭐냐면, 계좌 이체할 때 수수료 500원을 아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돈을 아낄 줄 알아서 성공할 수 있다고요. 대단하죠.


그리고 또 하신 말이 “삼성전자 주식 사라.”였습니다. 그때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인데 삼성전자가 2만 원일 때였어요. 저는 수수료 500원도 아끼지 못했고요. 그때 용돈 60만 원어치를 샀다가 2만 5천 원일 때 팔아서 주식 투자해서 돈 벌었다고 자랑하고 다녔었습니다.


그런데요. 돈이 그렇게 많으신데 친척들에게 돈 자랑을 하시거나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검소하셨습니다. 가족이 힘들 때도 그 힘든 일에 직접 돕지 않고 조카들같이 아래뻘 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셨습니다. 지금 당장 힘든 일을 돈으로 도우면 의존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앞으로의 미래에 투자해 주는 것이죠. 가난한 사람들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도 그렇게 공부해서 지금 목사로서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이유도 그때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그분은 몸을 움직이실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하시는 성실하신 분이시기도 했습니다.


보아스도 유력한 자인데도 이렇게 타작마당에서 같이 일하죠. 그래서 저희 당숙부와 당고모님들이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존경과 감사를 담아서 자서전도 출판해 드렸습니다. 부모님이 돈이 많다고, 아무리 큰 교회를 일궈냈다고 해도 존경과 감사가 없다면 자녀들이 자서전을 내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이 보아스도 존경받는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기업 무름을 해 주는 것이 보아스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아스에게도 이것은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특히나 보아스는 이 기업 무름 외에도 자손을 대신 낳아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도 상속권이 생기기 때문에 보아스에게는 재산상에 손해가 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업 무를 자도 그걸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이렇게 증인들까지 직접 세워서 법적으로 이것을 확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에 대한 증인을 세운 게 아니라, 혹시라도 나중에 모르는 사람이 “왜 기업 무를 자가 있는데 네가 했느냐?”라고 문제를 삼거나, 룻과 나오미의 회복된 재산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다는 증거를 남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증인을 넘어서 보아스가 얼마나 큰 짐을 졌는지, 그래서 그게 얼마나 대단하고 선한 일인지에 대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증인이 되는 것을 넘어 찬양을 합니다.


보아스의 선행을 통해서 이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표처럼 선한 영향력으로 공동체가 회복되고 다시 연합하자 증인이 세워지고 찬양하는 자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영향력과 연합의 마지막 목적입니다.


사람들이 “보아스가 참 대단하다.”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 이런 선한 일을 행하셨구나.”라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선한 영향력은 사람을 내게 모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 돌려드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런데 저의 삶은 어떤가요? 이웃이 진 인생의 짐을 보면 함께 지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왜 그런 짐을 지게 됐는지 잘잘못을 따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게 왜 그렇게 했어?”, “왜 미리 준비를 안 했어?”, “그건 네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잖아.”, “너희들 인생은 너희가 책임져야지 왜 그걸 공동체와 사회의 짐으로 삼느냐.”


물론 정말 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생긴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6장 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저희에게는 이웃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짐의 일부라도 함께 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실 그러라고 저희에게 믿음과 능력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과 2절이 오늘 말씀을 아주 잘 표현해 줍니다.


롬 15:1-2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조금 더 있을 수 있고, 능력이나 재산이 더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내가 잘해서 더 편하게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돈으로, 시간이 있으면 시간으로, 경험이 있으면 경험으로,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인내로 다른 사람의 짐을 들어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이고,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웃의 짐을 함께 진다는 것은 꼭 거창한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가 너무 지쳐 있을 때 내가 맡은 일이 아니어도 하나 더 해 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실수했을 때 “저 사람 때문에 일이 많아졌네.”라고 불평하기보다 내가 조금 더 수고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병들었거나, 마음이 무너졌을 때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고, 대신 아파줄 수 없지만, 그 짐을 혼자 지게 만들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짐을 질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율법에 그렇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저희의 짐을 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가장 무거운 짐은 바로 죄의 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건 네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저희가 져야 할 죄와 형벌의 짐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신이라는 이유로 십자가의 고통을 가볍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부활하실 분이었으니까.”, “하나님이시니까 덜 아프셨을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었던 죄의 짐을 지신 것입니다.


저희 역시도 내가 만난 사람의 허물을 들추기보다 덮어주고, 그 사람이 혼자 지고 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함께 들어주는 데서 선한 영향력과 연합이 시작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저 사람 참 착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씩 세워질 때 가정도, 교회도, 공동체도 다시 하나로 연합하게 됩니다.


딱 이번 주가 추석 명절이었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 편하고 반가울 수도 있지만, 오히려 가족이기 때문에 오래된 서운함과 상처가 다시 떠올라 말이 오가다가 분열을 향한 균열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혹시 많은 가족들 앞에서 남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는 않으셨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누리는 자들로서 가족의 허물을 덮어주고, 가족이 진 짐을 하나 더 들어 주는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저희를 보면서 “이번에 만나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저 사람과 있으면 서로 싸우지 않고 하나가 되는 것 같다.”, “하나님이 정말 함께하시는 것 같다.”라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선한 영향력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이런 은혜를 주셨구나.”라고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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