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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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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짝단어 03 룻 3.1-18 참 사랑으로 선을 이루다

2026년 8월 23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저는 악동뮤지션이라는 가수를 좋아합니다. 노래를 잘 부르기도 하지만, 사랑 노래가 넘쳐나는 시대에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깊이 있게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한글을 읽기 시작할 때 악동뮤지션의 노래 가사를 프린트해서 작은 책자로 만들고, 노래를 들으며 읽게 하기도 했습니다.


시대마다 이런 뮤지션들이 있었습니다. 조용필, 이선희, 김광석, 양희은 같은 분들입니다. 사랑 노래도 애절하지만 인생의 깊은 통찰을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 이야기만 넘쳐나는 시대에 이런 노래들이 오히려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세상의 사랑이 성경의 사랑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사랑받기를 얼마나 원하면 인류 역사 내내 그렇게 많은 노래와 책과 영화가 만들어졌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모태에 있을 때부터 학생이 되기까지도, 또 중고등학생 아이들도, 연애할 때는 그에 맞는 사랑이 필요하고, 또 부모에게서 독립한 성인도, 노인이 되어서도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먹고 자는 욕구를 꼭 채워야 하듯이, 사랑의 욕구가 채워지는 것은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런 사랑의 특징을 신명기 6장 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실 여기에서 하나님 여호와를 빼고 다른 것을 넣어도 다 말이 됩니다. 사실 어떤 대상에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누가 이렇게 사랑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듯이, 저희의 몸과 영혼이 어떤 대상을 이렇게 사랑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손에도 매고 미간에도 붙이고 집에도 기록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이런 행동을 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일상 전체를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한창 당구를 배우실 때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당구가 생각난다. 특히 잠자려고 누웠을 때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고 공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라.” 당구를 정말 사랑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누가 시킨 것이 아닙니다. 당구를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시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욕구를 움직이는 마음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중심에 두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 상대에게 필요한 선한 결과를 구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으로 선한 결과들이 쌓이면 서로를 더 깊은 관계로 연합하게 합니다.


반대로 마음의 중심에 내가 자리 잡으면 사랑의 욕구가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뒤틀립니다. 그러면 상대를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고, 결국 미움과 실망과 갈등이라는 악한 결과가 나오면서 같이 있고 싶지 않아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과 깊은 친밀함으로 연합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 다 사랑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하나님 중심적 사랑과 자기중심적 욕망을, ‘사랑받고 싶은 욕구’와 ‘사랑하고 싶은 욕구’로 나누어서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적 욕망은 사랑받고 싶을 때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가 채워 주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통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우리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궁극적으로 채워 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는 만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관계의 연합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시작했던 연인들이 왜 싸우게 되고 문제가 생기게 될까요? 점점 더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만족할 만큼 요구하기 시작할 때부터 싸움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그 요구가 나빠 보이지 않고,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순간 하나님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얻으려고 하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휙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방법과 때에 상대에게 강요합니다. “나한테 좋았으니까 너한테도 좋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의 중심에는 상대가 아니라 내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영양분을 잘못 공급받은 꽃처럼 점점 시들어 갑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고 심지어 성경적으로 옳은 것이라도, 상대의 형편과 하나님의 때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욕망으로 강요하면 관계를 연합시키는 사랑이 아니라 분열시키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중심적 사랑이라고 사람에게 사랑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궁극적인 만족을 채워 줄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배우자와 가족과 교회와 이웃을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통로로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내 이웃을 통해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날마다 발견하기 시작하면 그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쌓이고 흘러넘칩니다. 사랑은 없는 것을 억지로 짜내어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애써 모은 것을 억지로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고 싶을 때 막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상대에게 필요한 때와 방법을 살피며 지혜롭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제 두 사랑의 차이가 분명히 보입니다. 자기중심적 욕망은 내 만족과 내 뜻을 이루려고 하고, 하나님 중심적 사랑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이웃의 선을 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인인 우리가 자기중심성을 거슬러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서 올까요?


오늘 룻기 3장에는 그런 참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 사랑을 통해 어떤 선이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이런 사랑을 할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잘 나타납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성령의 능력으로 참 사랑을 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나오미를 보겠습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이제 룻이 밭에서 주워 오는 이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수가 끝나면 그것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가족이 없는 외로움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렵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오미가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절입니다.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룻도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고 고향까지 떠나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외롭고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자신을 봉양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계도 어려운 상황인데, 오히려 룻이 안식을 얻기를 먼저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친척인 보아스를 찾아가도록 실질적인 조언까지 해 줍니다.


흉년을 피해 가족과 함께 약속의 땅을 떠났었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다고 원망했던 나오미가 어떻게 이렇게 자기 불안을 먼저 해결하려 하지 않고 룻의 안식을 구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룻과 보아스까지 살펴보면 그 이유가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다음은 룻입니다. 룻은 젊은 여인이었고 보아스는 룻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를 통해 안식을 얻어 보라는 나오미의 말이 룻에게 쉬운 제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의 말을 따라 밤에 타작마당으로 가서 자고 있던 보아스에게 자신의 뜻을 전합니다. 9절입니다.


[9]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는 말은 자신을 보호해 주는 남편이 되어 달라는 청혼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룻의 요청은 단순히 자신의 외로움과 안식만을 위한 청혼이 아닙니다. 이어서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청혼을 나오미 가문의 회복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업 무름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와 가문에게 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회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 한 가문이 자손에게 이어 주는 삶의 터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이 여러 가지 이유로 가난해졌을 때 그 땅을 팔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문에게 주신 기업이 다른 가문에게 영원히 넘어가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친족이 값을 대신 내고, 그 땅을 다시 그 가문의 소유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기업을 무른다’고 하고 그 책임을 맡는 가까운 친족을 ‘기업 무를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가정에는 땅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어서 이 땅을 이어 갈 자손도 없었습니다. 원래 율법에서 땅의 기업 무름과 죽은 자의 자손을 이어 주는 제도는 서로 다른 제도인데, 룻기 4장에서는 이 두 문제가 하나의 가정 회복 문제로 함께 묶여 나타납니다.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보니까 보아스보다 가까웠던 친족이 큰 부담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룻의 요청은 단순히 “나와 결혼해서 내 외롭고 고통스러운 인생에 안식을 주세요.”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룻은 이렇게까지 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주 파격적이고 오해받기 쉬운 이런 방법까지 감수하면서 보아스를 찾아간 것입니다. 밤의 타작마당에 여자가 들어가서 남자에게 찾아가는 것은 오해받아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자기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도대체 룻은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보아스까지 살펴보면 이제 그 답이 명확해집니다.


마지막으로 보아스입니다. 추수철의 타작마당에서는 추수한 곡식을 바람에 날려 알곡과 껍질을 분리하는 키질을 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저녁에 강한 바람이 불어서 밤늦게까지 작업하기도 했고, 수확한 곡식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서 잠을 자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도 룻에게 타작마당에서 잠자는 보아스를 찾아가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의 타작마당은 남자들이 일을 마치고 먹고 마시며 잠까지 자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젊은 여인이 한밤중에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룻에게나 보아스에게나 얼마든지 오해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보아스도 뒤에 “여인이 타작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이 장면은 룻에게도 위험한 일이지만, 보아스에게도 시험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이고, 룻은 젊은 여자였고, 가난한 약자였고, 룻이 먼저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힘과 재산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쉬운 상황입니다. 누군가가 비난하면 “룻이 나를 먼저 유혹해서 어쩔 수 없었다. 저 여자가 나쁜 여자다.”라고 남 탓하기도 좋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신의 힘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룻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담대하게 찾아온 것을 먼저 이해하고, 그 행동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10절입니다.


[10]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인애’라고 번역된 헤세드는 관계 속에서 상대의 선을 위해 신실하게 책임을 감당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나오미와 그 하나님이 세우신 가문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드리는 룻의 사랑을 헤세드, 하나님 중심적 사랑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도 똑같이 헤세드, 하나님 중심적 사랑을 보여 줍니다. 이런 룻이 이렇게 선한 뜻으로 자신에게 청혼했으니까 이 청혼을 바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지만 보아스는 율법상 나보다 가까운 사람이 먼저이니까 먼저 말씀을 놓고 대화를 해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더 가까운 사람이 먼저 기업 무름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도 하나님 중심적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 너를 원하니까 너는 내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일이니까 하나님 말씀에 좀 어긋나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좋을 거야.”라고 합니다. 하지만 참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너에게 선한 것이 먼저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는 어떻게 이렇게 자기 욕망을 넘어 다른 사람의 선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 자리에서 보아스가 룻에게 한 말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보아스는 룻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현숙한’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가 2장에서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할 때 ‘유력한’에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능력, 힘, 재력이라고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보아스는 실제로 재산과 사회적 능력, 권력,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룻은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둘 다 ‘능력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은 나를 유혹하는 자기중심적 욕망을 거슬러서 하나님 중심적인 참 사랑을 하고, 내 유익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선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참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죄인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하실 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물론 룻기 3장은 “룻과 보아스가 성령 충만해서 이렇게 사랑했다.”고 직접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2장에서 처음 등장할 때 이웃에게 인사하면서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2장 4절입니다.


룻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은 저희와 성령으로 함께하십니다.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보아스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고, 보아스와 같은 단어로 평가받은 룻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나오미도 그 두 사람을 통해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다시 성령 충만을 회복하고 있기에 이런 참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참 사랑을 하며 자기보다 이웃의 선을 구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나오미는 땅과 자손과 무너졌던 가문의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룻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줄 남편을 얻었고, 영원히 심판받을 이방 여자에서 다윗 왕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어 지금까지도 저희가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보아스 역시도 다윗과 육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고, 성경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선은 세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룻과 보아스를 통해서 다윗 왕이 태어나고, 그 계보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참 사랑과 선한 결과가 가장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 성령님이 저희 안에 오시게 되셨고, 저희 같은 죄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능력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더 깊고 친밀하게 연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수님이 이 사랑의 길을 걷기에 앞서서 예수님도 성령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는 않으신가요? 상대방에게 내가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상대방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강요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사실 우리 안에는 하나님 중심적 사랑과 자기중심적 욕망이 뒤섞여 있어서 스스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다 알아도 참 사랑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조금씩 자기중심적 욕망을 거슬러서 참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관계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저희의 작은 사랑을 사용해서 가정과 교회와 이웃 가운데 그 크신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가 그 계보를 통해 다윗과 예수님이 오실 줄 몰랐을 것입니다. 저희도 성령의 능력으로 작은 사랑을 시작하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의 작은 사랑을 통해 가정과 교회와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선이 풍성히 이루어지는 복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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