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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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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강해 04 3.1-27 광야의 위기에서 구원 받는 방법

2026년 10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6]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18]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19]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읍과 모든 아름다운 성읍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20]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살다 보면 인생이 광야같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열심을 내어도 너무 메마르고 힘들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때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생을 일부러 광야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일부러 광야로 인도하셨듯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 욕심 때문에 광야를 자초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주인공인 여호람, 곧 아합의 둘째 아들은 자기 욕심으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모압이 이전에 바치던 조공을 끊자, 다시 조공을 받아 내고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4절입니다.

     

[4]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5]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아합 때에는 이스라엘 군사력이 강해서 이스라엘 동쪽에 있던 모압이 엄청난 양의 털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 정도 되는 양털을 사려면 요즘도 1, 2백억 정도가 든다고 하고 이것을 가공하면 가격이 열 배까지 오른다고 합니다. 고대에는 양털이 훨씬 더 귀했으니 엄청난 것입니다.

     

아합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사치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모압의 양털이었습니다. 아합이 죽고 국력이 쇠퇴하여 조공이 끊기자 여호람이 욕심이 나서 남유다 여호사밧 왕과 함께 공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람은 북쪽이 아닌 남쪽 광야 길을 선택합니다. 8절입니다.

     

[8] 여호람이 이르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그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하니라

     

지도를 보시면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쪽으로 내려가 유다와 동맹한 뒤, 유다 오른쪽의 에돔까지 동맹을 맺어 에돔 위쪽에 있는 모압을 공격하려고 한 것입니다. 모압은 ‘우리가 배반했으니 우리를 공격하겠지’ 생각하며 북쪽을 잘 방비했을 것입니다. 모압 남쪽은 원래 광야이기에 방비가 약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여호람은 멀리 도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욕심과 계략으로 제 발로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 광야에서 위기를 만납니다.

     

[9]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과 에돔 왕이 가더니 길을 둘러 간 지 칠 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우리 인생에도 우리가 아무리 꾀를 쓰고 노력도도 반드시 광야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목은 마르고, 길은 모르고, 해는 뜨겁고, 뱀과 전갈이 가득하여 위험합니다. 전쟁은 커녕 7일째 물도 마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 광야의 위기 가운데 구원을 받습니다.

     

광야의 위기에서 어떻게 구원 받게 되나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 한 사람으로 구원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위기에서 어떻게 구원받게 되나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한 사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이렇게 물이 없자 여호람이 당장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10절입니다.

     

[10]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도다 하니

     

이 원망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호람은 아합의 아들로 하나님을 잘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바알의 주상은 없앴다고 하지만, 여전히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2절, 3절입니다.

     

[2] 그(여호람)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 [3]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가요?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 대신 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러니까 여호람도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다 죽게 하시나 봅니다.’라고 합니다.

     

왜 우상 숭배자 여호람이 하나님을 원망하나요? 사실 우상 숭배와 여호와 신앙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상 숭배자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 백성입니다. 성경은 일부러 북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에 깊이 빠진 것을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짜로 믿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바알 숭배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온전한 예배와 의존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오고,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부르지만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 어떤 때는 돈이고, 어떤 때는 성공이고, 어떤 때는 자녀의 진학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본질 안에서는 여호람처럼 똑같이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을마다 교회들에 붙는 플래카드가 있습니다. ‘수능 100일 기도회’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에 가도 똑같이 붙어 있습니다. 그것만 보면 교회인지 절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열심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나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만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여호람이 여호와를 원망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하던 여호사밧 들으라고 원망한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드물게 신실히 하나님을 섬긴 왕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고 다 죽게 합니까?’라고 대놓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능력 있는 것 맞아? 네가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 살아 계신 것 맞아?’ 문제는 남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서 그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가 내면에서부터 올라올 때 우리 안에서 계속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결국 여호람처럼 반응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나를 죽이려고 그러는 것인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11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11a]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하는지라 …

     

앞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합도 여호사밧을 초청해서 아람을 공격하러 갈 때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묻자고 해서 미가야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살 길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연합하고 있지만 그래도 신실한 사람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알지만 우상 숭배자인 여호람은 ‘슬프다. 왜 우리를 다 죽게 하는가?’라고 원망하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자기가 그리로 가자고 해 놓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 어려움과 고통을 왜 주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그때 마침 엘리사가 주변에 있었습니다. 11절 하반절입니다.

     

[11b] …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사실 엘리사 이야기 가운데 이 이야기가 끼어 있는 것입니다. 이 왕들이 여호와의 선지자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갔는데, 엘리사는 어떻게 반응했나요? 13절에 여호람에게 이야기합니다.

     

[13]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

     

냉소적으로 내칩니다.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던 바알과 아세라한테나 가지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습니까?’ 마치 안 도와줄 것처럼 말하고는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14절입니다.

     

[14] 엘리사가 이르되 ...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나는 우상 숭배자와 관계 맺고 싶지 않지만 내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이유는 여호사밧 때문이다. 여호사밧이 없었으면 당신 일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호사밧을 봐서 이 일을 하겠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사밧이 누구인지 역대하 17장 3절, 4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역대하 17:3-4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을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풍습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저와 성경을 오래 보셨으면 이것이 누구 이야기인지 감이 오실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완전한 왕이 아닙니다. 왜 자꾸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어서 문제에 처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며 계명을 지켰다고 하지만, 여전히 흠이 있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은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무엇인가요? 앞으로 오실 완전하신 구원자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모형입니다. 여호사밧은 다윗의 후손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또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이 구약의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성령으로 하나님과 함께하심으로’ ‘완벽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라고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여호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욕망의 도구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다 낙담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께 떳떳하게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여호람이 여호사밧 때문에 살게 되었듯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표적 모형입니다. 우리가 여호람이고, 여호사밧이 예수님의 모형을 보여 준 뒤, 실체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가요? 예수님께서 오시기 훨씬 오래전부터 성경은 ‘이런 분이 오실 것이다, 오실 것이다, 오실 것이다.’ 이야기합니다. 수십 명의 저자가 이 이야기를 성경 곳곳에 담아 놓았고, 정말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광야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도 힘들고, 목이 마른 것도 힘들지만, 뱀과 전갈 등 독의 위험도 무섭습니다. 성경의 광야에서는 주로 뱀과 전갈이지만, 인생에서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뱀에 물려 온몸이 불타듯 뜨거워진 것은 무엇을 보여 주나요? 죄인들이 서로 물고 뜯어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죄의 파괴적인 영향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를 깨물었나요?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여 깨물고, 서로를 원망하여 깨뭅니다. 뱀으로 말미암아 원죄를 얻게 된 인간의 본질이 얼마나 무섭고 더러운가를 광야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유일한 살 길이 무엇이었나요? 놋으로 만든 뱀을 매달아 그것을 보는 자를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또 광야가 힘든 이유는 기온 차가 너무 심해서 낮에는 타들어 갈 것처럼 고통스럽고 밤에는 살이 에이듯 춥습니다. 이런 광야에 우리는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고, 또한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도 약하고 악합니다.

     

약해서 도와주려고 하는데 악하게 깨무니까 서로 힘듭니다. 그래서 불쌍했다가도 미워지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여호람처럼 원망하지 않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일단 하나님부터 원망합니다. ‘왜 여기로 보내셨나요? 왜 저 사람을 만나게 하셨나요? 왜 필요한 것을 안 주시나요?’

     

제 20대 전체가 광야였습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시고, 집이 차압당해 쫓겨나서 월세 15만 원짜리 지하에 공용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화장실 있는 집에 살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그 집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하루에 여러 개씩 매일 과외를 가야 했는데 하루는 정말 가기 싫고 삶이 너무 고달팠습니다. 차라리 교통사고가 나서 내 보상금으로 가족이 평안하게 사는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정말 차에 치일뻔한 적이 있어서 죽는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눈을 떠보니 1cm 차이로 차가 멈춰서 운전자를 노려본 적도 있었습니다. 왜 나를 칠 뻔 했냐가 아니라 왜 멈췄냐는 분노였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제 마음 상태가 그랬습니다. 독이 가득했습니다. 제가 바로 광야의 뱀과 전갈이었습니다. ‘일승아, 우리 하나님을 믿자’ 말씀하시는 어머니에게 ‘엄마처럼 열심히 믿다 이렇게 됐지. 하나님이 진짜 계시면 그렇게 잘 믿는 집을 이렇게 만드십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 쓰러졌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던 제 독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제 인생이 끝난 줄 알았던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잘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과 관계 없는 존재이고 싶었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믿는 부모님께도 고난이 왔는데, 부모님처럼 열심을 낼 수 없는 나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과 가깝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계속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오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광야에 들어갈 때마다 여전히 제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광야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믿음을 지킨 것이 아니라 원망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가 힘들고 몸이 아프고 돈이 없어서 매일 울었습니다. 화가 나서 울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왜 고통스러운가? 우리를 죽이려고 미국에 보내셨나?’ 여호람처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하나님 사이에 서셔서 저의 의가 되시고 구원이 되셨습니다. 저는 광야에서 계속 넘어지고 계속 원망하는 여호람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제가 왜 매주 예수님을 이야기하나요? 구약을 보는데도 왜 예수님을 말하나요? 이 광야에는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존재가 없음을 인생 내내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호람 같은 우상 숭배자를 예수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인생에 좋은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쁜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 왜 그러십니까?’ 하던 여호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광야는 저주가 아닙니다. 이 광야를 지나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맛보게 됩니다. 광야가 아닐 때에는 물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광야에서만 물이 생명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생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외치게 됩니다.

     

또한 광야에서 말씀이 얼마나 단지를 알게 됩니다. ‘광야’의 히브리어인 ‘미드바르’의 어원은 ‘말씀’이라는 뜻인 ‘다바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에게 말씀의 만나를 주시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뜨거운 해와 밤의 추위를 막아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 능력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광야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 무력함을 경험하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광야는 구원의 장소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광야의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광야의 위기에서 어떻게 구원 받게 되나요?

2. 완전한 공급과 승리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두 번째로, 광야의 위기에서 어떻게 구원받게 되나요? 완전한 공급과 승리의 약속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엘리사는 처음에는 안 하려고 했다가 여호사밧을 보아 하나님 뜻을 구합니다. 15절입니다.

     

[15]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성경에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경우는 유일합니다. 그래도 이를 통해 찬양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고 은혜의 통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주일을 지내며 얼마나 분주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많이 보며, 정신이 얼마나 흐트러져 있나요? 그래서 예배 전에 찬양하며 ‘하나님,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합니다.’라고 결단하고 회개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자 하나님이 16절에 말씀하십니다.

     

[16]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병사들을 통해 커다란 웅덩이를 파라는 것은 뜬금없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십니다. 첫 번째 약속은 17절에 있습니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이스라엘에는 바람이 불어야 비가 내리고 물이 생기는데, 그런 징조가 없는데도 물이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8절에 두 번째 약속도 주십니다.

     

[18] …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넘기시리니

     

광야에서 물도 얻고 승리도 얻게 된다는 놀라운 약속인데, 첫 번째 약속이 바로 다음 날 성취됩니다. 20절입니다.

     

[20]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신비로운 일입니다. 광야에 갑자기 물이 흘러와 군사들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 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이었지만, 모압 백성에게는 심판이 됩니다. 성경에서 물은 항상 생명과 심판 두 가지 이미지입니다. 모압 백성에게 어떻게 심판이 되었나요? 22절, 23절입니다.

     

[22]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치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23] 이르되 이는 피라 틀림없이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오해였지만 이전에도 서로 싸우다 다 죽은 일이 있었어서 ‘이번에도 그렇구나. 나가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 다 죽게 되고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의 앞두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24]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들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하나님께서 첫 번째 약속도 성취하셨습니다. 두 번째 약속도 거의 성취되어 이제 성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성만 점령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벌어진 뒤 승리하지 못하고 전쟁이 흐지부지 끝나 버립니다. 어떤 일인지 26절과 27절을 보겠습니다.

     

[26]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 [27] 이에 자기 왕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

     

전세가 기울어서 거의 이긴 전쟁입니다. 그러자 모압 왕이 갑자기 성 위 다 보이는 곳에서 자기 아들을 번제로 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왜 이스라엘이 갑자기 고국으로 돌아갔나요? 이것은 구약의 10대 난제라고도 이야기하는데 성경의 문맥을 보면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압은 몰렉, 밀곰, 그모스라고 불리는 신을 숭배했습니다. 얼굴은 황소같고, 배에는 큰 구멍이 있어서 그 구멍에 불을 피우고 거기에 자녀를 태우는 것입니다. 이런 미친 짓은 우상 숭배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지금 모압 왕에게 무엇이 절실히 필요했나요? 전쟁의 승리입니다. 그러니까 우상의 힘을 덧입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해서 가장 가치 있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라는 희생 제물을 태워 바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다치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격노가 임해 고향으로 돌아갔나요? 우상 숭배자인 여호람이 우상에 대한 강한 헌신을 목도하자 갑자기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저렇게 강렬한 헌신과 열정을 보이다니. 그모스와 몰렉이 우리를 심판하여 전쟁에서 패배하게 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여호람과 우상 숭배자들은 자신들보다 더 강렬한 우상 숭배적 열정 앞에 벌벌 떨면서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을 잊고 고국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은 우리 행위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열정과 행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자주 받는 유혹입니다. 참 복음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유합니다. 자유해서 자칫 방임할 수 있습니다. 한편 또 유혹도 받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다른 사람을 보면 ‘나처럼 살면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세상은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고 자기 문제를 해결해 줄 우상들을 열렬하게 섬깁니다. 그들의 헌신을 우리는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부동산, 주식, 뷰티 각종 분야에서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전파하려는 이들의 채널이 수백, 수천개가 됩니다. 그들의 열심은 우리 누구보다 뛰어납니다.

     

이런 우상 숭배적 유혹 앞에 있으면 우리 안에 혼란이 닥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그러나 여러분이 어떻게 사느냐는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너희와 관계없이 내가 승리를 주겠다.’라는 약속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는 것이지, 제가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따라 제 구원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하찮은 육신으로부터 구원해서 거룩하고 완전한 영혼을 갖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깨어진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약속을 끝까지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헌신으로 그 결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승리를 위해 지금도 역사를 진행해 나가고 계십니다. 이런 허접한 인생 또한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썩지 않고 거룩하고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끝까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 광야의 인생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여 어떤 존재가 되게 만드실지 목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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