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3] 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16]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장에는 바울의 세 번째 간증이 나옵니다. 이 간증을 듣는 두 명의 세상 사람이 등장하는데 한 명은 로마 총독인 베스도이고 다른 한 명은 유다의 왕인 아그리바 2세입니다. 당시 유대 지역에서 가장 큰 권세를 가진 이 두 사람들을 통해 성경은 세상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이전 총독 벨릭스는 8년간이나 유다 지역을 다스렸기에 유대인이나 유대 교회에 대해 익숙했지만, 베스도는 유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배경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기독교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 없는 베스도들이 많습니다. 기질과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과학자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기도 합니다.
한편 아그리바 2세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헤롯은 에돔 출신인데 유다 왕이 될 때 사람들이 이방인의 통치를 반대할까봐 유대 여자들과 결혼을 했고 그 이후 태어난 자손들도 왕으로 통치하면서 유대 여자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즉 어머니가 유대인이라 유대인과 유대교에 익숙했던 에돔 혼혈 아그립바는 종교에 관심도 있고 지식도 있는 사람을 대표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학교에 다니며 채플도 드렸고, 기독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고 성경도 압니다. 또는 가족이 교회를 다녀서 종교적 배경은 있지만 믿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들에게 바울이 간증을 했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본문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간증하고 전도할 때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간증할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1. 미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간증할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첫 번째로 미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베스도는 어이가 없어서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베스도는 왜 바울을 미쳤다고 여겼나요? 첫 번째는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8절입니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바울에게 소명을 주신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이고, 바울이 법정에 선 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하자 미쳤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세상의 자연 질서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살리사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 또한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의 핵심을 담대하게 전한 것입니다.
베스도의 말대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 미친 소리에 불과하다면 성경에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무덤에 장사 지낸 이후에 이들은 어떤 행동을 보였나요? 다 무서워서 도망갔고 낙심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물고기를 잡던 이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인생을 바쳤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 열 두 제자 중 12명 가운데 요한 빼고 11명은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변화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순교할 수 있을까요?
지도자가 죽으면 기독교가 흐지부지 될 것 같으니까 제자들이 말을 맞추기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짓말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치며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었고 그것을 목도한 자들이 많이 있었기에 기독교는 놀랍게 부흥했고 이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을 미쳤다고 한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3절로 15절의 바울 간증의 핵심은 예수님이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13] …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빛으로 나타나 대화를 했고, 그로 인해 바울이 변화되어, 기독교를 박해하던 자가 예수를 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이런 초자연적인 개입을 믿지 않지만 기독교 역사에, 아니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인생에 하나님의 개입과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나요?
물론 우리 중에 갑자기 빛이 나타나 눈이 멀고 신비한 음성을 들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특별한 사명이 있어서 특별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예시를 통해 사도행전은 하나님이 어둠에 속한 자를 어떻게 생명으로 인도하시는지를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를 믿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빛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임을 믿게 되었다면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함을 받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말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역사와 개입이 없이 바울의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상하고 미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베스도가 바울을 미쳤다고 생각한 이유는 바울이 자기 생존을 넘어선 신적 소명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17절과 18절입니다.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베스도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욕망, 자기 안전, 자기 성공을 위해 살아가며 로마 총독의 자리까지 오른 베스도는 누구보다 많이 노력하고, 암투를 이겨내고, 능력을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열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그 열망을 이루든 이루지 않던 결국 낙담하게 됩니다. 모두가 열망하지만 대부분은 좌절하고 실제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그들조차 허무감을 느낍니다. 무엇을 향해 이렇게 열심히 달렸는지를 고민하며 내면이 망가지게 됩니다.
욕망을 뒤로 한 채 하나님을 위해 생명을 내걸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적 소명입니다. 빌라도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빌라도는 총독 중 가장 오래 유대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능력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반란이 일어나면 바로 퇴출될 텐데 빌라도가 오랫동안 총독자리를 지킨 것을 보면 늘 정치적으로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한 후 말년에 정신병에 걸려 하루 종일 손을 씻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정치적 판단을 내렸고, 그 이후 정신적으로 무너져서 ‘나는 무죄하다 무죄하다’ 손을 씻으며 정신이 분열된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경험하는 끝입니다. 열망을 이루지 못해서 불행하고, 열망을 이루어 보니 허무합니다. 자기에게서 생존과 미래에 대한 답을 찾으면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뛰어넘는 소명을 받은 사람만 상황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저도 소명을 받기 전에는 제가 무엇에 적합하게 지어졌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미래를 모르니 스스로를 한계 안에 가두기도 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개입해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인생을 인도하신 결과가 너무나 아름답고 그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되었습니다. 성도에게는 모두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넘어선 소명이 존재합니다.
모두 목사가 되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확정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도 있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평신도로 바울과 아볼로와 동역하고 교회를 세운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울은 서신의 끝에 항상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안부를 묻습니다. 어떤 때에는 수십 명이 나오는데 그들은 다 사역자가 아니라 바울이 방문했던 곳에서 바울과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썼던 동역자들입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허무를 넘어선 소명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생의 목적을 어느 정도의 성공, 돈, 직위 등으로 정하셨다면 방향을 수정하셔야 됩니다. 생존을 넘어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기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여러분을 통해 어두움이 물러나고 빛이 드러나는 것이 여러분의 매일의 기도가 될 때 여러분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삶에 멈춰 있지 않고 더 크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사용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베스도는 도저히 이런 인생을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여러분 자신의 부활,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부활을 믿으셔야 합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고통하고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을 벗는 날 다시 만나자는 소망으로 살 수 있고, 늘 연약하여 실패하지만 완전하게 될 그 날을 꿈 꿀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로는 아니어도 돌아보면 우리가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개입과 은혜가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명이 있기에 우리는 욕심에 매이지 않고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몇 주 전에 제 모교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 명 이상 출석하는 큰 교회고 저와 청년부를 같이 다닌 분들이 장로님들이고 또 부모님과 친했던 권사님들도 아직 계시고 하여 한참 전부터 설교를 잘 하고 싶은 생각과 고민이 많았습니다.
설교 한 주 전 어느 밤에 자다 눈이 번쩍 떠졌는데 기도해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벽에 기대어서 조용하게 기도하는데 영화를 튼 듯이 예전에 그 교회를 다닐 때 있던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 때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나고, 몸은 아프고, 학교도 못 나가고,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며 비참했던 제 인생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소명을 주시고 제가 은혜 받고 목사가 되었던 일들이 기억나며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특히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알았고 태중에서 구별하여 열방 중에 선지자로 불렀노라’ 예레미야 1장 5절로, 식물인간 같이 죽음을 기다리던 저를 불러주신 장면이 생각나서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인생을 다 훑으려면 밤을 새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났는데 그 교회를 떠날 때까지의 기억이 지나자 마치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듯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생각해보니 모교회에서 멋들어진 설교를 하려고 하지 말고 당시에 받았던 은혜를 나누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고등부 때 계셨던 전도사님이 현재 담임 목사님이 되셨고, 강단에 올라서니 청년부 선후배들, 당시에 저희 가족을 위해 기도해주셨던 권사님들이 다 보여 말씀은 짧게 나누고 당시의 일을 나누며 서로에게 큰 은혜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때 은혜를 받고 회복한 후 학교에 돌아가서 사실 서울대를 전부 복음화하겠다는 열정에 불타서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열심히 간증했습니다. 학과 사무실에 하루 종일 앉아서 죽을 뻔 하던 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살리셨으니 너도 예수 믿어야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살았는데 한 선배가 찾아와서 너무 광신적으로 종교 얘기를 하지 말라고, 특히 후배들이 너무 힘들어 한다면서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언제 누구한테 전도해야 하나 조심스러워졌는데 아버님이 목사님이라는 한 후배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간증에 엄청 은혜를 받더니 저에게 과를 위해 기도회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처음 기도회를 하려고 일찍 학교에 갔는데 사무실에 잠겨 있어서 잔디밭에서 첫 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에 서로 친구들과 후배들도 불러서 예닐곱 명까지 모였는데 어느 날은 성령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부어주시자 모두가 한 마음으로, 어두움에 사로잡힌 이 학교와 학생들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저를 미쳤다고 생각한 동기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을 통해 어둠에 속한 자들에게 빛을 비추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간증을 가지고 계신가요? 그 간증을 나눌 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동하며 은혜를 누리시나요? 혹은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는 핀잔을 들으시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나누고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누구신 가 계속해서 드러내야 될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서도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바울처럼, 어느 자리에서든 누구에게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증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간증할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2. 하찮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간증할 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찮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적은 말’은 짧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다른 뜻으로는 ‘하찮은 말’이기도 합니다. 뉘앙스를 담아 번역해보면 ‘그깟 몇 마디 말로 나를 예수 믿게 하려고 해!’라는 뜻입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의 말을 왜 하찮게 여긴 것일까요? 바울이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개입과 놀라운 사명을 받았다는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법정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자신은 왕이 되어 떵떵거리고 있습니다. 아그립바가 본 현실은 예수 믿어서 감옥에 가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나요? 29절입니다.
[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어두운 자에게 빛이 비추어, 파괴적인 자기 열망에 사로잡혀 있던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게 되는 놀라운 변화. 이것은 은혜 받은 자에게 주어진 참 축복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다고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한다고 다 행복한가요?
대한민국은 50년 전에 비해 유례없이 잘 살게 되었지만 아직도 1년에 만 오천 명씩 자살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라고 달리며 서로 비교하다 마지막 수단을 택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마음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바울은 상황에 매이지 않았기에 자기보다 훨씬 더 큰 권력과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나처럼 되길 원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다가 로마로 압송되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네로 황제에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때가 AD 60년 경인데 바로 10년 뒤 AD 70년에 로마 군대가 성을 훼파시켜서 30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사람이 다 죽고 예루살렘이 무너졌습니다.
이쯤되면 아그립바도 그 자리에서 내려왔을 것 같은데 얼마나 처신을 잘했는지 로마 황제가 그를 시리아 등 다른 지역의 황제로 임명했고 그래서 AD 100년까지 황제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위기 요소를 넘기고 이후 40년이나 더 왕이 되어 이곳저곳을 통치하다 늙어 죽은 아그립바가 훨씬 성공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바울처럼 확신 가운데 살아가는 것, 참 축복이 무엇인가 믿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성공해야 전도에 힘이 실린다는 주장이 우세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그립바의 생각입니다.
예수의 참 가치인 영적 생명이 아니라 세상의 힘으로 예수를 소개하는 것은 기복주적 종교입니다. 우리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참복입니다. 세상은 하찮게 여기는 모습을 가진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복음을 전함으로 가능합니다. 바울은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어떤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나요? 로마서 1장 16절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가난했고, 사역비가 없고, 한 끼 식사비가 없고, 세상적으로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믿고 전했더니 어떤 일이 나타났나요?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보시면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믿는 자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믿고 계신가요? 우리가 먼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어둠 가운데 말씀으로 하나님이 빛을 주시고, 말씀으로 인도하시며, 혼란 가운데 말씀이 걸음을 이끄시는 은혜를 맛볼 때 여러분은 말씀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 ‘네가 믿는 말씀은 하찮아, 복음은 미친 소리야’라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점점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경험한 자들은 복음에 능력이 있음을 믿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 진리로 한 주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