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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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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009 고난 09 사 53.1-6 고난을 통한 구원의 방법

2025년 11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 유수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구원이 임할지를 알려줍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부터 자유를 준 왕은 고레스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앞으로 참 자유와 구원을 주신다는 메시아인 예수님을 모형한 왕이었습니다.


현재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구원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자유가 임한다는 구약의 가장 중요하고도 기쁜 메시지인 본문의 예언이 어떻게 시작되나요? 1절 상반절입니다.


[1a]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


아무도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왜인가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인간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이 신비하고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1. 기대할 수 없는 약한 존재로 구원하십니다. v.2


첫 번째로 기대할 수 없는 약한 존재로 구원하십니다. 2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2a]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


연한 순은 나무에서 봄에 조그맣게 자라나는 봉오리입니다. 뿌리가 마른 땅에서 나왔다는 것은 가뭄이 지속되어 흙이 푸석푸석해지고 날아가면 물을 찾던 뿌리가 말라 비틀어진 채 볼품없이 땅 밖으로 올라온 상태를 말합ㅎ니다.


사람들은 강하고 멋진 존재가 자신을 구원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연하고 약한 순과 볼품없는 뿌리 같은 구원자를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기에 이사야 53장이 ‘이 말을 누가 믿겠는가’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순과 뿌리는 비유였지만 2절 하반절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2b]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긴 금발의 미남 백인으로 예수님을 묘사한 성화가 많다 보니 여러분도 예수님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뙤약볕에서 목수일을 하던 평범한 팔레스타인 남자가 정말 그런 외모를 가졌을까요?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구원자를 볼 품 없는 모습으로 보내겠다고 수천 년 전부터 약속을 하셨을까요?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구원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군가가 나를 고통에서 건져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고통’이라고 여기는 대부분의 문제는 ‘결핍’과 관련이 있습니다. 돈, 건강, 인간관계, 공부하는 능력의 결핍. 그래서 이 결핍을 채워줄 능력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고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진짜 고통은 절대적 결핍이 아닌 상대적인 결핍입니다. 남과 비교해보니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잘나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덜 가진 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끼니 사먹을 돈이 없어서 궁핍한 것이 아니라 나는 만 원짜리 밥을 먹는데 오십 만 원짜리 밥을 먹는 사람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결핍의 이유입니다.


문제는 그가 간절히 원하는 무엇인가가 채워진다고 해서 결핍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고 완전한 평화와 안정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결핍이 찾아옵니다. 근원적 결핍의 이유는 죄이고, 죄가 영적 공허를 야기합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공허하니까 욕망으로 나를 채우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욕망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자기 순환적 논리를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인간의 비교 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하여 그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흘러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SNS입니다. 힘들거나 약한 면을 올리는 사람은 없고 모두 가장 멋지고 잘난 순간들을 올리고, 서로 확인하고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특히 코로나 때에 학생들이 학교를 안 가면서 SNS에 빨려들기 시작하고 1년 사이에 SNS 시간과 트래픽이 180% 증가했습니다. 틱톡은 3년 만에 전 세계 10억 명의 사용자가 생겼습니다. 그 결과 외모 지상주의가 젊은 아이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10대 여자 아이들 4명 중 한 명은 섭식 장애를 경험하고 100명 중 1명은 아예 밥을 전혀 먹지 않는 거식증에 걸렸습니다.


몸무게가 20kg까지 내려갔는데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가장 어린 나이로는 여섯 살 아이가 밥을 거부해서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정신적으로 무너져서 영혼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내가 조금 더 똑똑해지고 조금 더 돈이 많고 조금 더 건강하면 다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기복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방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진짜로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죄는 상관없어. 문제가 해결되면 나는 고통스럽지 않고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결핍에 고통하는 존재가 아니라 근원에서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존재로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마태복음 1장 21절에 쓰여 있습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가 우리의 죄를 구원하여 우리를 근원의 결핍에서 구원하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 알지만 우리의 근원적 문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과정들로 찾아오십니다. 모두들 자기 인생을 최고로 설계하지만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그 장소, 그 과정, 그 사람이 어쩌면 우리를 가장 변화시키고 구원하여 결국에는 예수를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의 방식과 하나님 방식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가장 크게 변화된 시간은 유학의 기간이었습니다. 떠나면서 저는 글로벌 영적 리더가 되고, 학문적으로도 탁월한 신학자가 되고, 한국에 획을 긋는 목회자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즉 유학을 통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학생 때 새벽 4시에 영어 학원 다니고, 연구하기를 좋아하고, 남보다 많이 기도했던 것도 이것을 위함인가 생각하며 꿈에 부풀자 마침 미국에 가자마자 꿈을 꾸었는데 한국의 대표 목사님이 ‘네가 한국 교회를 이끌 내 후계자’라고 말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제 영혼의 깊은 곳에 있었던 은밀한 영적 욕망이었을 뿐인데 저는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막상 학기가 시작되었는데 글로벌 리더는 커녕 계속 대화로 진행되는 세미나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과 무능과 무명의 수치와 매일 싸워야 했습니다. 유학으로 결핍이 채워져서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기대를 했는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기 시작했습니다.


저보다 공부 열심히 하는 목사 없었고 저보다 많이 기도하는 목사 없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들보다 더 탁월한 존재가 되고 싶었는데 하나님은 저를 짓밟고 짓밟으셨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저처럼 고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렇게 짓밟히고 깨어짐이 아파서 울고 기도했는데 제가 무너지지 않고 내 안에 나는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남았습니다.


여러분 다른 교회 설교 들어보셨겠지만 매주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 믿으라고 얘기하는 설교가 있나요? 제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제가 기대했던 유학이 제 근원을 파괴하고 예수가 나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글로벌 리더, 탁월한 신학자, 한국의 대표 목사 등 호기롭게 세웠던 다짐들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영어로 설교하는 일은 지금 제게 주어진 사역과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또한 학문적으로 뛰어나서 한국 신학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 역시 제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시는 다른 분들이 계십니다. 또한 저는 한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주어진 가족을 사랑하고 섬기고 여러분들 사랑하고 섬기고 저처럼 불쌍하고 연약한 목사님들을 섬기는 일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가 받아들이며 큰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유학의 고난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나를 전파하고 나를 확장하고 나를 설교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기대한 것과 다른 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제가 이전에는 거들떠 보지 않던 그 약한 예수를 나의 유일한 사랑이요, 나의 유일한 의존으로 삼게 하신 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에도 여러분이 기대하지 않았던 과정이 임할 때에도 그것을 통해 예수만 온전히 의존하는 성도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2.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도록 구원하십니다. v.3-6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도록 구원하십니다. 3절입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단순히 흠모할 것이 없는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멸시와 고통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홀대당하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늘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나 미모나 권력 등의 힘을 갖기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으셨기에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간고와 질고를 겪으셨습니다. 간고는 슬픔과 애통으로 근원이 부서질 듯 아픈 고통이며 질고는 질병이 가져오는 인간의 육체적 연약함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다 경험하셨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멸시당하고, 내적으로 부서지고, 육체적으로 연약해서 고통하셨습니다. 이 모든 고통을 예수님이 왜 당하셨나요? 4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존재가 되어 우리가 고통하고 벗어날 수 없는 자리에 대신 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이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무언가 잘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5절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합니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인간 고통의 근원 안에는 죄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가정하면 관계는 깨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자들을 보면 짓밟고 강한 자를 보면 주눅 들고 나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다 보니 인간관계가 뒤틀려서 일생을 고통하게 됩니다. 이 근원적 고통을 본질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죄가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정말 우리를 위해서 그 자리에 서셨는지를 모릅니다. 6절입니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해서 제 길로 갔고 하나님은 예수에게 이 모든 것을 담당시키셨습니다. 결과가 무엇인가요? 끝이 났나요? 예수가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신 결과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선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 영광의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6절을 보면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과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은 싫어하고 영광만 좋아하지만 영광은 고통을 통해 육적 자아가 깨어질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걸어가신 동일한 과정이 성도의 인생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시면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성도에게는 반드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난이 없이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 자체가 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과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이 익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자주 보시겠지만 나이가 들면 오히려 고집 세지고 편협해지고 두려움이 많아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는 자고 싶고, 사탕 먹고 싶고, 물건 나누기 싫은 욕망을 감추지 않다가 어른이 되면서 욕망을 이성으로 누르며 감추고 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튀어오르는 욕망을 이성이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며 그 때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인생 가운데 미리 고난을 보내십니다. 고통에서는 인간의 본질이 튀어 올라옵니다. 말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했던 사람도 죽음 앞에 서면 얼마나 깊은 두려움이 나를 지배했었는가 드러나고, 실패하면 내가 얼마나 성공을 열망했었는지, 내가 얼마나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었는지 정말 직면하게 됩니다.


고통의 자리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영혼 안에 진짜 무엇이 있는지 경험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런 순간을 맞이하시는 것이 축복입니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어두움이 튀어나오면 본인은 보지 못하고 주변 사람만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셔서 여러분의 본질을 마주하게 하실 때 ‘하나님 내 안에 있는 어두움이 이 고난을 통해 제거되고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타나 이웃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 인생이 되도록 축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게 되는 놀라운 복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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