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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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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교 009 고난 08 고후 1.3-10 고난 중의 넘치는 위로

2025년 11월 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본문에는 다섯 절 안에 위로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반복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있음을 알려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언제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되나요?

1.넘치는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언제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되나요? 첫 번째로 넘치는 고난이 있을 때입니다. 5절 상반절입니다.

     

[5a]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

     

바울의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8절과 9절 상반절은 이렇게까지 이야기합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a]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

     

바울과 그 동료들이 받은 고난은 그들이 잘못해서 받은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전했는데 단순히 힘든 정도가 아니라 고통스럽고 두려워서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처럼 고통했다고 합니다. 그가 받은 고난이 11장 23절부터 25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고후 11:23-25 [23]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일반 사람은 이 고난 중 하나라도 경험하면 아마 포기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40에서 하나 감한 매는 단순히 채찍이 아닙니다. 채찍 끝에 쇠조각이나 짐승의 뼈다귀 같은 것을 매달아서 맞을 때마다 몸 껍질이 벗겨져 피가 흘러서 죽게 되는 태형입니다. 그것을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요즘은 신체적 태형이 거의 없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나라가 싱가포르입니다. 특별히 성범죄자들을 몽둥이로 때리는데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나라에서는 성범죄자 재범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쁜 짓이 아닌 복음을 전하다가 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 인생에 고통과 힘듦뿐이었던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반드시 함께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절 하반절 보시면

     

[5b] …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하나님 백성이 고난을 이겨냈다면 그 사람이 무언가 탁월하고 의지가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아이들에게도 위인전을 읽히면서 멋진 사람을 본받으라고 조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큰 고난을 지난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위로 또한 크게 함께 하는 것입니다.

     

위로가 무엇인가요? 고통하고 있는데 ‘괜찮아, 잘될 거야’ 말하는 것인가요? 위로의 헬라어 ‘파라클래토스’는 ‘옆에서 이야기하다’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는 이 단어가 아주 특별하게 번역됩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보혜사’가 바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한자 뜻도 ‘보호해 주고 은혜 베푸는 사람’이기에 영어로는 카운슬러, 상담가, 조언 해주는 사람 정도로 번역을 합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온다면 이전 보혜사는 누구신가요?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혜사셨습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시고, 고난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이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떠나십니다. 제자들만 이 땅에 홀로 남겨두시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곧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이 지금도 우리 옆에서 보혜사로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지날 때 어떤 사람이 ‘괜찮아, 잘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왜 위로가 되지 않나요? 인간은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의미 없이 하는 말은 힘이 없습니다. 고난이 힘든 이유는 그 일 때문이 아니라 이 일로 인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인생을 다스리고 미래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저에게도 아버지의 부도, 가난, 질병 등의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과정을 통해 훨씬 유익한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에서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전혀 다른 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도 되지 않고 그냥 살아가다 필요한 때만 하나님을 찾는 수준에서 멈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예상하지 못하고 원하지도 않았던 고난을 지나가며 오히려 믿음을 배우고 하나님을 배우면서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풍성한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1년만 기다려’ 하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구체적인 것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시간 개념과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위로를 주시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모든 말씀을 성경에 다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때에는 이미 알고 있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만 알던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파라클레토스 보혜사이신 성령이 우리의 믿음을 세워나가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은 고통을 왜 지나갔는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9절 하반절을 보시면

     

[9b] …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우리가 평소에는 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절박하게 의존하지 못하나요? 우리 나름대로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감기에 들리면 약 찾아 먹고, 안 되면 병원 가듯, 우리는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노하우가 다 있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언제가 고난인가요? 내가 평생 살아온 나의 방법과 능력으로 해결이 안 될 때가 고난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 한두 번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뿌리가 깊습니다.

     

영혼에서부터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영향력 때문에 내가 얼마나 똑똑한가, 돈이 많은가, 능력이 있는가 등으로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존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가장 무서운 죄성입니다. 이 죄는 무엇을 갖고 오나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니까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인간은 절박해야 귀를 기울입니다. 내 안에 내 생각이 꽉 차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나요? 결국 고난을 통해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존하며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왔다 떠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지금도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요? 고난의 때에 낮아진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주세요’ 간구하며 하나님 앞에 설 때 이전부터 알고 있던 말씀이 우리 영혼 안에서 새로운 능력과 힘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지난 바울이 무슨 고백을 합니까? 10절입니다.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처음 고난을 당했을 때 ‘이젠 죽었구나’ 했는데 고난을 넘어갑니다. ‘내가 살아났네?’ 그런데 그 일이 반복되고 반복되자 자기 열심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셨구나, 은혜가 아니었으면 죽은 거였구나’를 계속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믿음이 생겼나요? ‘우리도 건지셨으니 고난당하는 너희도 건지실 거야’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 믿고 큐티한다고 믿음이 생기나요? 믿음은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지나가며 하나님이 일하심을 깨달을 때 생깁니다.

     

바울은 믿음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지나가며 죽다 살아나고 죽다 살아나면서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체험하고 나서 확신 있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으신가요?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하게 느끼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반드시 고난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질병, 사업 실패, 파산 그런 고난이 아닌 내가 의존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존하는 과정을 지나가면 말씀이 선명해지고 강해집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하나님 음성 듣는 법 책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듣고 싶은 음성은 대부분 이 사람, 이 학교, 이 거래가 맞는지, 나에게 유익이 될지입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권사님을 찾아가서 기도 받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더 좋은 것을 선택하고자 신적인 인도함을 받고자 하는 것은 점쟁이 찾아가서 복채 내고 점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의 궁극적인 안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확신입니다. 문제 하나 해결됐다고 인생이 끝인가요? 인생에서 문제는 계속 찾아옵니다. 고등학생은 대학이, 대학에 가면 진로가, 진로가 정해지면 업무의 위기, 또 인간관계와 돈 문제는 끊이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면, 문제 하나가 잘 해결되는지의 여부는 의미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셔서 내 인생을 통치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근원적 확신이 말씀 가운데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요동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고난을 당할 때 이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문제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들고 계시고 인도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우리 안에 있어야 이 문제가 지나간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음성에 대한 전제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하나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시험을 못 봐서 절망하고 울고 있었는데 그때는 믿음도 없고 성경도 모르니까 하나님이 저에게 가장 맞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일승아 내가 너를 사랑하다’ 영혼에 그 말씀이 울려 퍼지자 엄청 울고 기뻐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자꾸 듣고 싶었지만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성경에 가득 써 있습니다. 제가 못 믿었던 것입니다. 대학생 때도 집이 망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좋은 얘기는 하나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나쁜 얘기는 마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덫입니다. 하나님이 잘 된다는 얘기만 하시나요?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죄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때는 성경도 모르고 기도만 많이 하니까 잘못된 강화가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극이 강해지면 내면의 소리가 점점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심한 것이 욕망과 두려움의 소리입니다. 그 때 저는 그것을 모르고 기도를 많이 하자 잘 될 거라는 소리만 커졌는데 제가 영적으로 연약하고 성경을 모르니까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가끔씩 들었던 말씀을 새로운 성경책인 양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적어놨는데 지금 보면 성경에 다 있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고 성경을 몰랐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셨는지 지금 보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때 제 수준에 맞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그러다 너무 감사하게 제가 성경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다 우리를 위한 말씀인데 궁극적으로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무서운 죄악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제가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나요?

     

사실 기도가 아니라 욕망이었습니다. 20대 때 제일 많이 한 기도가 ‘좋은 사람이랑 결혼하게 해주세요.’였습니다. 풀어 보면 나 힘들고 불편하지 않게 해 달라는 내 욕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배우고 고난을 당하며,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점점 하나님 음성이 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무슨 결정을 할 때 예전처럼 오래 기도하지 않습니다. 질문합니다.

     

내가 희생해야 되나? 하나님 음성이 맞습니다. 네가 사랑해라, 네가 포기해라, 네가 용서해라. 이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는 일인가? 이전에는 나에게 유익인가를 고민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면 하나님 음성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가를 질문합니다. 내가 잘 되고 내가 성공하려던 고민이 적어지자 이 또한 선명합니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벌어진 일들을 성경을 통해 깨달으며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될수록 우리는 진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요즘은 제 문제보다는 주변 생각을 많이 하는데 가끔 불안하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다 아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1 Peter 5:7 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

     

20대 때 너무나 좋아했던 말씀입니다. 제 안에 염려가 너무 많아서 더 붙잡았습니다. care라는 단어 안에 손길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멀리서 보시지 않고 곁에서 쓰다듬으며 돌보시고 함께 가신다는 느낌이라 그 때 다시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이 손길로 우리를 붙들으시고 안아주시고 함께하시는 것을 믿으면 염려가 나를 지배하지 않을 텐데 내가 아직도 하나님의 케어를 못 믿었구나 하며 다시 한 번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궁극적 위로를 줍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한 위로로 여러분을 회복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언제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되나요?

2.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사명이 있을 때입니다.

     

두 번째로 언제 넘치는 위로를 받게 되나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사명이 있을 때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당해도 싸다고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 위로하시며 붙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위로를 받는 사람에게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 사도가 고통을 많이 겪는 중에 하나님의 위로하심 또한 많이 겪은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다른 사람 또한 위로할 수 있는 자로 준비된 것입니다. 6절 상반절입니다.

     

[6a]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

     

심지어는 자신이 받는 환란 또한 고린도후서 교인들이 구원받고 위로받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들이 경험하는 과정입니다. 세상은 높은 자가 되라고 하지만 하나님 백성 중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내가 먼저 환란을 통해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존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하나님이 어떠신 분인가를 진짜 경험함으로, 환란 가운데 있는 다른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리더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자리에 설 수는 없지만 ‘하나님 저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세울 수 있는 리더로 세워주세요.’라고 기도하실 수는 있습니다. 물론 환란을 달라고 기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이 알아서 준비시켜 주실 것입니다. 6절 하반절입니다.

     

[6b] …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이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경험하자, 편지를 받는 사람들한테 ‘너희도 이 고난을 견디어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견디다’라는 단어는 지난번에 살펴본 ‘소망’입니다. 그냥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승리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소망을 두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많은 성도들은 그의 고난을 지켜보았습니다. 바울이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수없는 고난을 지났는데 하나님의 위로로 이겨냈고, 하나님은 너희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푸실 거야. 그래서 내가 소망을 포기하지 않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지날수록 다른 사람을 더 잘 세워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도 많은 고난을 지났습니다. 남들처럼 쉽게 목회도 못하고 이 교회를 개척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셔서 이 교회만 생각하면 하나님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지금 많은 목회자들에게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지금 저에게 배우는 목회자들은 소위 어렵고 힘든 목회자들입니다. 얼마 전에도 어떤 목사님이 성공하지 못하고 인생이 불안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찾아오셨습니다. 목회를 쉰지 얼마나 되셨냐고 물었더니 3개월이라고 하시길래 나는 10년 쉬었다고 얘기했습니다.

     

목회의 길이 열릴지에 대한 것은 표면적인 것이고 사실은 돈 걱정입니다. 저는 아버지 망하시고 이 교회 시작하기까지 20년 동안 돈이 없었습니다. 저도 살아남았다고, 하나님이 필요한 돈 주실 거고, 지금은 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사람과 돈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이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제가 확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 저는 그런 분들이 몇 년이라도 고생스럽지만 하나님을 진짜 깊이 경험하기를 은근히 바랐습니다. 한동안 연락이 없길래 물어보니까 이미 다른 교회 부목사로 옮기셨습니다.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니까 아는 사람 연결하고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서 목회를 시작하니 마음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노력으로 안 되는 상황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목회의 길이 열리지 않던 상황이 지금 돌아보면 제일 큰 축복의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그런 일을 허락하십니다. 내 능력으로는 해결 못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배우기 원하시나요?

     

죽을 것 같은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경험하고, 여러분이 바로 위로자가 되어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전파하는 마치 바울과 같은 사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로와 은혜를 충만히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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