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주일예배 설교문/ 장우현 목사
[3] 왕위에 있은 지 제삼년에 그의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지방의 귀족과 지방관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9]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 붙는 듯하더라
서론
에스더서는 에스더를 통해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일과 그 뜻을 기념하는 책입니다. 기념의 의미는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슬쩍 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잘 기억해서 마음의 중심에 간직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1장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왜 분노가 나고 관계가 깨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그런 세상을 따르다가 세상의 포로가 된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과 뜻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희가 이미 봤었던 1장과 2장을 대조해 보면서 저희가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더 명확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1. 십자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고,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을 원합니다. 무시당하고, 하찮고 필요 없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 받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돈, 능력, 커리어를 의존하고 추구하는데요, 그것이 사람들이 오늘 하루를 사는 동기이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에스더 1장에서 자신의 부, 능력, 커리어를 자랑하는 왕과 왕후의 잔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자랑의 이유는 1장 4절에 드러납니다.
1:4 왕이 여러 날 곧 백팔십 일 동안에 그의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왕이 자랑하고 있는 것들을 영화롭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가 영광입니다. 히브리어로 영광은 무겁게 여긴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의 한자도 무거울 중에 필요할 요자를 쓰니까 사람이 무엇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과 통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영광을 추구한다는 말을 잘 안쓰잖아요. 그래서 비슷한 표현인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추구한다고 바꾸면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와닿게 됩니다.
그리고 영광의 한자는 밝을 영, 빛 광인데요, 밝게 빛이 나는 보석처럼 귀하고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것을 내가 가지면 내가 빛나고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생각 되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의 동기이고 삶의 의미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SNS에 좋다고 하는 것들을 올리거나 그걸 계속 보면서 자신의 자존감의 근거를 찾다가 중독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SNS 중독이 위험하다고 저희 교회에서도 자주 말씀드리는 이유가 삶의 바향과 질을 결정하는 자존감의 근원을 자극하고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영광스러운 것을 추구하고 자랑하는데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의 본성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희가 꼭 필요하다고 주시는 것들을 가치있고 중요하게 여기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신 분이라고 온 세상에 자랑하고 알리는 것이 오늘을 살게 하는 동기이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로 저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107문답으로 이루어진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의 첫 번째 문답에서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높여드릴 때 하나님은 저희를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높여주십니다. 그것이 사람이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게 되는 성경적 원리입니다. 물질이나 능력을 자랑해서 스스로 높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저희를 육체로 만드셨고, 그에 필요한 피조물들을 다채롭게 창조하시고 이 땅에서 살아갈 능력도 다양하게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을 비하하고, 무소유를 주장한다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가치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물질들도 다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저희가 에스더 1장과 2장에서 살펴봐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인생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왕과 왕후는 부부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드러나게 해준 것이 분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시면서 분노와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세트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인의 본질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서도 셋트로 나타납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누가 다 훔쳐가거나, 썩혀서 버려도 화가 안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운전을 하면서 기분나쁜 상황이 생기면 창문을 쫙 내려서 화를 냅니다. 왜 화를 낼까요? 함께 타고 있는 가족의 안전을 중요하게 여겨서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는 상대방이 나를 무시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족이 타고 있더라도 내가 화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난폭운전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것은 가족의 안전이나 상대방에 대한 용납 보다도 자신의 자존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저도 이상하게 운전하는 사람들 마주치면 속에서 분노가 훅 올라옵니다. 그런데 저는 화를 잘 내지 않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서가 아닙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보여지는것입니다. 속으로 분노하고 용납하지 못하는데, 겉으로는 괜찮은척하는거에요. 이런 사람을 '위선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하게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분노마저도 표출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런 죄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지 못했다면 분노가 표출되는 대신에 우울증이 생기거나,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을 자존감의 근거로 삼고 계속 살았을 것입니다.
이 선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것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제가 만약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설교하는 이 무능력한 모습을 부끄러워 했을 것입니다. 설교자로서 능력이 부족해 보이잖아요. 저는 사실 말을 잘 하기도 하고, 많이 하기도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어리든 전화통화를 하면 1시간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친구 목사 교회의 청년부 모임에서도 같은 에스더 말씀으로 성경구절만 A4 용지로 한 장 뽑아서 1시간 설교 합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반장 부반장을 하고, 운동회 때 학년 대표 응원단장도 하고, 고등학생 때까지 별명이 미국의 개그맨 짐 캐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는게 두렵거나 떨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런데 개그맨 기질이 있다보니까 말을 할 때 농담을 잘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데, 제가 담임목사도 아닌데 웃기게 설교를 하면 안됩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임의대로 하면서 수려하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성경의 내용에 저를 붙들어 매서 성도님들께 영적 유익을 드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니까, 사실 이렇게 읽고, 버벅거리고, 로보트 같더라도 저는 하나도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각자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추구하고 자랑하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없어서 질투하거나, 좌절하고, 그것을 잃거나 무시당해서 분노하고 갈등이 생기니까 마음의 평안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갈등은요, 나쁘고 악한 것들을 추구하는 중에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평등. 너무나 중요하고 좋은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치는 균형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걸로 여당과 야당이 나뉘어서 서로를 향해 칼날 같은 말을 주고 받구요, 국민끼리, 세대끼리 갈라지고, 나라와 나라간에 전쟁을 해서 많은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부부관계도 같습니다. 많은 부부가 성격차이라는 이유로 갈등합니다. 그런데 성격차이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나는 이걸 맛있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저걸 맛있다고 하는거에요. 나는 아이들에게 이걸 이만큼 먹여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상대는 저걸 저만큼이나 먹여?가 되는 것입니다. 먹는 문제, 별거 아닌 것 같은데요, 사람은 하루에 세 번 이상을 먹기 때문에, 한 주방에서 따로 해먹고 살다보면 따로 사는게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안전한 자산에 두고 싶은데, 상대는 위험하지만 가능한 젊을 때부터 고위험 고수익 자산을 불리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갈등이 깊어지면 각자 번 돈 따로 쓰다가 삶의 방향이 따로따로가 됩니다. 당사자들을 만나서 이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면요, 누가 맞고 누가 틀리다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교회에서도 나쁜일 하다가 갈등과 분노가 일어나나요? 대부분은 하나님의 일 하려는데 각자 더 중요하게 여기는게 달라서 문제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맛있게 음식을 하느라 재정을 좀 많이 써도 괜찮다고 하시는 분이 있으실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밥 맛있게 먹으면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돈을 우리가 먹는데 너무 많이 쓰지 말고 더 유익한 곳에 쓰자고 하시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 말도 맞는 말입니다.
결국 다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가치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가치판단의 문제로 갈등이 생기고, 분노가 나고, 미워지고, 관계가 깨지려고 할 때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요? 하나님은 이런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저희를 구원하시기 위해 1장에서 죄와 그 결과를 보여주시고 2장에서 구원 계획과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핵심 구절인 2장 12절을 보겠습니다.
2:12 처녀마다 차례대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여자에 대하여 정한 규례대로 열두 달 동안을 행하되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하게 하는 기한을 마치며
저희는 몰약과 향품을 통해 하나님이 에스더를 희생물 삼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갈등을 해결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요? 에스더의 희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은 사실 하나님 자신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바로 왕과 왕후가 갈등으로 관계가 깨졌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갈등으로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나보다 더 중요게 여긴다는 마음의 중심이 드러납니다. 무엇을 마음의 중심에 두느냐는 것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선악과를 에덴동산이라는 성전 중앙에 두신 것은 성전된 성도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을 둬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의 중심, 그 생각하는 뜻이 달라졌씁니다. 그렇기에 죄를 반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죄와 분리된 거룩입니다. 그 거룩에 흠이 가니까,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흠이 가니까 진노를 하시게 되고, 그것을 제거하시기 위해 심판을 하시게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왕과 왕후의 관계처럼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방법이 십자가로 자신을 희생하셔서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저희는 십자가에서 드러나는 저희를 향한 그 엄청난 사랑을 보면서 내가 저 중요한 것 보다 내 뜻과, 내 자존심과, 물질을 더 중요하게 여겼구나 하고 통회하면서 십자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십자가가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 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분노를 잠재우고, 양립하기 힘든 중요한 가치들을 통합해서 평안을 주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행하신 십자가 희생은 저희가 기억하고 함께 십자가를 지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계획이자 뜻입니다. 서로 성격도 다르고, 신앙심도 다른 성도들이 교회와 가정으로 모여서 각자의 다양성과 다름을 존중하면서 함께 하나님을 영광의 자리로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 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나의 연약한 치부를 드러내 수치스럽게 한 자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요, 그것은 약간 모호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막 열심을 부리고, 큰 교회 건물을 짓는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서 1등을 하고, 대상을 받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돈 많이 벌었으니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린다고 해도 영광이 돌려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살다보면, 양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내 생명조차도 그렇게 집착할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서 더욱 온전히 사랑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셔서, 하나님께 칭찬과 사랑을 받는 것을 자존감의 근거로 삼고, 삶에 분노와 우울을 잠재워서 사랑과 평안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성도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2. 수치로부터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수치는 영광의 반대 개념입니다. 그래서 영광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추구해서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내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라면, 수치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잃거나, 원래 없어서 무시당하고, 내가 중요한 존재로 여김을 받지 못해서 자존감이 낮아졌을 때 오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어렸을 때 성적인 학대나 성폭력을 당해서 극한 수치를 겪으신 분들이 심리치료로 수치심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수치심을 어린 나이에 제대로 해결받질 못하고 십수년이 지나니까, 자존감이 너무 낮아져서 대인관계 기피증이 생기거나, 나도 모르게 남자들을 경멸해서 부부관계에서 분노가 통제되지 않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 남자가 나를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 같고, 아니면 나는 안좋은 경험을 한 여자라 사랑 받지 못할 존재인데, 저 사람은 왜 나를 사랑하지? 하며 오히려 분노가 통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적절한 인정과 칭찬을 받지 못하고 계속 잘못한 부분만 지적받거나,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을 무시해서 함부로 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도, 낮은 자존감 문제로 수치심을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리치료는 문제를 깊이 이해를 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1대지에서 봤던 영광스러운 것을 추구하려는 본성을 하나님이 주신 것처럼 수치심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수치심을 왜 주셨을까요? 바로 죄로 인해 자기와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려다가 실패했을 때 수치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51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서 상한 심령이 바로 고난 가운데 관계가 다 깨지고, 의존하던 것들을 잃어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자존감이 바닥을 친 영혼의 상태입니다. 저희가 심령이 상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할 때, '이제와서 돌아오겠다고? 됐어!' 하면서 저희의 통회하는 마음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이 그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기본적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을 얻었을 때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을 피하게 하고, 상대에게 분노하고, 상대방 탓을 하면서 이 죄책감과 수치심를 남에게 전가하게 만드는 문제를 만듭니다. 그래서 1장에서 왕이 왕후에게 책임과 수치심을 전가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수치스럽게한 대상을 심판하고 남탓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가리고 영광을 회복하려는 모습인데요, 그래서 이 모습 역시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 복수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하지 못하는 지긋지긋한 남편, 잔소리만 하는 아내, 직장 상사, 이 원수를 대신 심판해서 대리만족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돈과 힘과 권력이 생기게 되면, 아하수에로 왕처럼 상대를 찍어 눌러서 관계를 다 깨뜨립니다. 그럼 정말 내 수치가 가려져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이 왕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면서 진짜 왕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관계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니까 2장에서처럼 더 자극적인 욕망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더 자극적인 욕망을 추구하라고 하는 세상의 지혜, 마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눈치를 보면서 돈과 권력을 뜯어먹는 이리떼 같은 사람들만 주변에 남게 되고, 왕이 약해졌을 때 결국 그 이리떼가 덮칩니다. 자기를 가장 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배신하는 것이죠.
왕은 자기 수치를 덮으려고 했지만, 성경은 바로 자기 힘으로 수치를 덮으려고 이웃을 파괴하는 모습이 수치스러운 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나 아하수에로 왕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숨고, 남탓을 하려는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을까요? 에스더 2장에서 그걸 보여주셨습니다.
2:7 그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었으나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의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을 한 예수님의 모형이고, 모르드개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없던 에스더를 양육한 것은 단순히 먹이고 입힌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양육하며 보호한 것을 보여줍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보호라고 하면 어떤 사고나 질병, 실패나 나쁜 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도 보호해주시는 분이시지만, 사고가 나거나 병에 걸리면 하나님이 저희를 보호해 주시지 않은 것일까요? 누구는 정말 잘 보호해 주시는데, 나는 보호해 주시지 않고 차별하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보호를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죄의 수치로부터 말씀으로 보호해 주시는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이 말의 의미는, 저희가 구원 전에는 죄인의 수치를 안고 있을 때 말씀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 보호해주시고, 또 구원 받은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인도하셔서 수치스러운 죄악된 삶과, 마귀와 이단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제 막내 아들은 일찍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호흡기로 숨 쉬고 있다가 잘 쉬니까 간호사가 일찍 호흡기를 뗐습니다. 그런데 그 때 숨을 못쉬어서 뇌의 운동신경쪽이 다쳐서 심한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5살인데 여전히 다리를 절고 불편하니까 기어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런데요, 저는 아이를 4명을 키웠는데요, 막내 하담이만 하루종일 찬양을 큰 목소리로 합니다. 제가 성경 연구를 하는데 방해가 되서 조용히 해달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오는데, 찬양하는데 조용히 하라고 하기가 그래서 그냥 두니다. 아이들이 하루종일 큰 목소리로 찬양 하는 것은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입술에 찬양을 붙여서 영혼에 새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양을 듣는 가족들도 말씀으로 보호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메시지를 창세기부터 반복적으로 하시면서 그 죄책감과 수치심 때문에 내 앞에서 숨지 말고, 이제 내 앞에 담대하게 나와라, 내가 예수의 보혈로 그 수치를 덮어줄테니 방패 같고, 요새 같은 내 보호 안으로 들어와라라고, 아직 죄인된 저희를 먼저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치심이 덮인 저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와 말씀으로 양육받으면 수치와 분노와 갈등과 분열의 삶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로부터 말미암는 원죄와, 저희 인생에 가득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부터 온전히 치유받는 방법이구요, 이것 역시도 구원 받은 저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계획과 뜻입니다.
불신자였던 제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게 된 것도 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던 것으로부터 돌이키고, 예수님의 보혈이 덮여 수치심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좋은 말, 선한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칭찬 받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기 전까지는 그걸 저의 자존감의 기반으로 삼을만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게 제 성격이거니 하고 살았습니다. 다들 그렇잖아요.
그런데 제가 대학생 때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연변과기대라고 하는 중국의 학교에 교환학생을 가게 됐습니다. 그곳은 한국의 한 교회가 세운 선교지여서 교수님들, 직원들, 학생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는데요, 저는 불신자였기 때문에 그런 곳인지도 모르고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엄청 착하게 지낸거에요. 저는 중학생 때부터 중국과 무역업을 하려고 중국어를 배워서 회화가 가능했습니다. 그 때 회화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워서 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60명 정도가 교환학생을 왔는데, 다들 중국어 못하니까 제가 택시랑 버스 태워주고, 은행 업무 봐주고, 장보는데 도와주고, 수업 신청하는거 도와주고. 또 제가 기계 같은거 수리하고 사진 찍는게 취미였거든요. 그래서 노트북 고쳐주고, 여행다닐 때 사진 찍어서 인화 해주고. 그 모든 사람들 생일마다 교환학생 다 모아서 생일파티 거하게 해주고. 그냥 뭐, 원래 지내던대로 착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선교지이고, 외지이다 보니까 학생들이 정말 외롭고 의지할데가 없었어서 저의 그런 도움이 정말 고마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저에게 식사 대접하겠다고, 막 약속들을 잡기 시작한거에요. 그런데 제가 착한아이잖아요. 그래서 거절을 못한거에요. 그래서 하루에 식사 약속이 네 다섯개씩 잡혔습니다. 아침식사 하나, 점심에 12시에 있으면 1시에 또 잡고, 저녁에 6시에 있으면 7시에 또 잡고. 굉장하죠?
결국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게 그냥 후딱 밥 먹는 약속도 아니고, 교회 다니는 청년들이 고맙다고 삶도 나누고 그러는데, 어떻게 1시간만에 밥 먹고 얘기하면, 택시를 타도 다음 약속에 가질 못합니다. 결국 밥 먹는 중에 다음 약속 잡은 사람에게 계속 전화가 와서 금방 가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지금 밥먹는 사람도 무슨 일 있냐고 불안해 하고. 그런데 저는 미안하니까 괜찮다고 하고. 결국 시간 늦어져서 뒷사람은 마음 다 상하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하죠?
그런데 그 때는 그게 그냥 제 성격인줄 알았어요. 거절 못하는 성격. 남 도와주고, 사람 좋아하고, 얘기 듣기 좋아하는 성격. 하지만 마음의 중심에는 인정받고, 칭찬 받아서 높여지는 제 자존감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죄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런 일이 계속 쌓이니까요, 아무도 저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제가 괜히, 사람들이 저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은거에요. 나를 좀 피하는 것 같네? 하면서 저 스스로 수치심에 짓눌리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인정과 칭찬을 잃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거에요. 그래서 그 때 한 두 주 동안 굉장히 우울해서 아무 연락도 받지 않고 혼자 수업 듣고 혼자 조용히 기숙사에 와서 누워 있고를 반복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까? 뭐가 문제일까? ,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면서요.
그런데 어느날도 그렇게 수업 끝나고 혼자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뭉글뭉글 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마치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 같은, 젊은 분들 표현으로는 썸타는 기분. 그런데 그 때 제가 누굴 좋아하거나 그러진 않았습니다. 제가 이래봬도 은근히 눈이 높아서요. 그런데 그 날은 뭔지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이상한게, 제가 원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엄청 경멸했거든요.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기도한다고 하면서 막 말을 하고,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게 광신도 같았어요. 그리고 인생은 자기가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지, 사람이 만들어서 있지도 않는 신에게 의존하는 것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별로 사랑하며 사는 것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독선적인 집단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그런 마음이 싹 사라진거에요.
그래서 학기 초부터 저를 막 전도하면서 새벽에 Q.T 모임 하자고 했던 형님을 찾아가서 Q.T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그러니까 그 형이 다음날 아침 6시부터 나오라고 했어요. 형님이 대학생들 모아서 아침에 Q.T하고 밥 같이 먹고 수업 가는 모임인거에요. 그런데, 거기서 성경 읽고 적용을 하는데, 이 20대 대학생들이 그런거 아직 잘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 때 성경 처음 읽는데 막 깨달아지면서 제 삶에 적용을 하고 쏼라쏼라 말을 하게 됐습니다. 마치 성령님이 제 혀를 움직여 주시듯이요. 그랬더니 학생들도 다 놀라고, 그 리더 형님도 놀라서 저를 영어과 교수님이자 선교사님께 데려갔어요.
그 교수님은 제가 길을 가다가 뭉글뭉글 해지고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바울사도 같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런데 그 때 저는 바울사도가 누군지 몰랐죠. 그러면서 요한복음을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Q.T 모임에서 한 학생이 자기가 보던 쉬운성경을 선물로 줘서 몇 시간 만에 후딱 읽었는데요, 그 때, 이 예수님이 이런 나의 죄를 위해 수 천년 전에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가 그걸 모르고 예수님과 교회를 무시하며 지냈구나를 알게 되서 눈물이 좔좔좔 났습니다. 아마 제가 기독교인과 예수님을 그렇게 멸시했기 때문에 저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그 슬픔에 며칠동안 수업도 안들어가고 동아리실 문잠그고 들어가서 요한복음을 다시 읽으면서 기도를 했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지은 죄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죄인지도 모르고 지은 죄들이 영화 필름처럼 막 지나가는거에요. 그 때 회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몇 주 동안 저를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과 수치심이 사그라든거에요. 마귀가 그 수치심을 이용해 공격하던 것을 예수님이 보호해 주신 것이죠.
그 때 중국에 긴 명절 연휴가 있어서 학생들 모두가 여행을 갔습니다. 원래 제 모습이라면 사람들 다 모아서 인솔해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혼자 연휴기간 갈 수 있는 먼 곳까지 침대 기차를 타고, 3층에 누워서 성경을 읽으며 중국의 이곳저곳의 한인교회를 탐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기차 침대칸에서 예수님 꿈을 꿨습니다. 예수님 얼굴은 안나왔는데, 새하얀 천 옷이 저를 감쌌습니다. 그런데 직감적으로 그 만난 시기가 지금이 아니라 제가 모든 인생을 다 살고 난 후에 만난 시점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깼을 때, 아, 예수님이 나의 이전에 지었던 죄들도 용서해 주셨지만, 앞으로 죽을 때까지 지을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구나 생각이 들면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지만, 더 디테일하게 보면, 말씀이 믿음의 확신을 줘서 죄와 유혹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큰 은혜로 인해서 제가 착한아이 컴플렉스가 있고, 그게 죄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됐고, 거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그 때가 25살 가을이었는데요, 그걸 어느정도 벗는데 10년 가까이 걸렸구요, 지금도 여전히 그걸 벗고 있는 중입니다. 그 10년도 다행히 이 하늘사랑교회와 복음을 만나서 가능했던거에요.
저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먼저 불러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을 근거로 삼는 자존심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삶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믿게 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면서 내 자존감이 밟히는 것처럼 여겨질 때 받게 되는 수치심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역시도 각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 하는 삶의 모습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 성격이라고 둘러 덮거나, 상대방 때문에 내가 이런거야라고 덮어 씌우거나, 아니면 돈, 능력, 커리어로 덮어서, 나 원래는 대단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야라며 살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그런 삶의 모습이 계속 누적되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깨어져서 삶의 평안을 잃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그 문제는 사람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들을 먼저 불러주실 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마음에 새기셔서 십자가를 마음의 중심에 두시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치유 받으심으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믿음과,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