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는 ‘때’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주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며 어떤 일을 하시기를 거부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이야기하자,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때’는 무엇일까요? 늘, 일관되게 하나님이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십자가 사건의 때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어 오시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행하시는 시점,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일이 일어나는 십자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중심을 가지고 모든 결정과 모든 행동을 하셨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달리 이것이 목적이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모든 것을 이 관점을 따라 판단하셨습니다.
성도에게도 이런 관점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생명이 없던 자가 생명을 얻은 것이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으로 살아가지 못하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쉽습니다. 세상은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마귀와 욕망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믿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나요?
1.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vv.1, 6-9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이 구절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을까봐 유대로 가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여러 번에 걸쳐 그런 이유가 아니라, 지금 예수님이 그들에게 잡혀 죽임당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오늘 본문에도 때가 등장하는데, 여기서의 때는 약간 다른 때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이고, 지금은 올라갈 시간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는 이 때는 결국 자기가 무엇을 결정하는 기준조차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이지, 어떤 사람의 위협 때문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일까요?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여 자신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으로 결정하고,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악이라고 판단하는 것을 붕괴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이 일이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
예수님이 하셨던 두 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안식일을 예수님이 깨트리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결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이유는 인생을 옭아매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함으로 욕심을 채우고자 하는데, 진짜 안식, 사람들이 원하는 쉼은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것을 구체적인 여러 가지의 규율로 만든 것일까요? 율법을 만들어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얼마나 더 괜찮은 사람인지를 판단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시선으로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능력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기 위해 율법을 그 목적으로 사용하니, 율법을 주신 원래의 목적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남과 비교하여 남과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얻어 괜찮은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을 이해했던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을 주일로 이름을 바꿔 율법을 지켜나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잘못된 선악의 판단입니다. 주일에 무엇을 하지 않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남과 비교하여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죄악의 근원인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판단할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는 모습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늘에서 온 자라고 하시니,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영광과 권세 있는 모습이 보였다면 예수를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에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선이었습니다. 자신이 더 괜찮은 인간이 되고자 하며, 자신이 볼 때 좋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살기가 가득한 그들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에 관계없이 행동하셨습니다. 적대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따라 결정하셨습니다.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 가운데 사람들의 영향력과 압박에도 불구하고 영향을 받지 않고 반응하실 수 있었던 태도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판단한 것입니다.
인간은 평행적 시간관 가운데 살아갑니다.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존재하는 것인데, 인간이기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를 미리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놀라운 능력이 있다면 과거나 미래로 가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이 직선적 시간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선형적이고 나선형입니다. 마치 타원이 돌아가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목적에 따라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셨고 미래에도 하나님이시기에 현재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시간에 매여 시간의 힘 가운데 통제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를 시간의 압박에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모든 인생에게 영향을 미쳤듯,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는 자들은 시간이 가져오는 압박을 벗어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시간에 따라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예측하며 세상을 바라보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20대만 해도 결혼 시기가 늦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20대에 결혼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시간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가운데 자신들이 생각하는대로 시간에 대해 그림을 그립니다. 문제는 인생이 다양한 곡선을 그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계획한 목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것이 전부인양 살아가기 때문에 뒤처지면 두려워하며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시간의 축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영적 관점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때를 맞춰 살아가셨 듯 성도의 인생 가운데도 구원은 새로운 시각과 태도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살아가는 단순한 인생이 아닙니다. 택한 자들이 이 땅에서 각자 어떤 기회와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도록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기회라면,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남들이 살아가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예수를 닮은 자로 만드실까라는 계획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목적으로 인생 가운데 벌어지는 모든 것이 새롭게 재편성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많은 일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정해둘 때,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남들과 다른 우리의 실패의 과정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인 구원을 완성해나가십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우리 인생을 바라볼 때, 이 땅에서 오히려 실패하고 좌절하는 일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이루는 더 중요한 일이며,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이 일들을 사용하셨음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인생 가운데도 제가 생각하던 것과 다른 일들이 일어나면 두려워하며 걱정했습니다. 20대 때, 30살 전에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했더니 배우자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졌습니다.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기도만 했더니 조건이 43가지가 되었고, 하나하나 압축된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20대 동안 연애를 한 번도 못했고, 이것이 저에게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물론 저 역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압박이 심했습니다.
30살이 되어 대학부를 맡아 사역을 하였는데, 교제하는 사람들이 없으니 위에서 볼 때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저를 불러, 대학부 사역을 계속 하려면 결혼을 하든지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제가 신대원 3학년 때였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독신으로 결혼을 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심했습니다.
갈등이 심해서 하나님과 해결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말고사가 끝난 그 날, 모든 학생들이 다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오후 2-3시쯤 되어서 채플실로 올라갔습니다. 총신 채플실이 그 당시에는 산에 임시로 양철 지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없을 때 기도하면 소리가 울리고 하여 기도가 더 잘되었습니다. 거기서 울면서 저는 기도하였습니다. 서러워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울면서 기도한 이유는 제가 정해두었기 때문입니다. 제 기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입니다. 저 때문이었지만, 저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원망만 하였습니다.
그 때, 제가 어떤 맘으로 10년을 살았는지가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10년간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를 찾았지만, 수백 명을 엑스표시를 치며 살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갈망하며 살아갔던 나의 모습을 갑자기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울다가 너무 창피해져 울음이 멈췄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제가 하나님의 생각을 오해하며, 하나님을 빚쟁이로 생각하며 살았던 것을 깨달았음을 울며 고백하였습니다.
그 날을 제가 잊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마치 유대인들처럼 정해놓은 틀, 정해놓은 시간, 정해놓은 나의 선을 하나님께 요구하며 채우기 원했는데 그 근원 안에 저의 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 인생 가운데 연애를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들 속에 욕심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제 아내를 만나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제 인생에서 결혼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어떤 것이 나를 움직이는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가 어쩌면 간절히 원하고 반드시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을 내가 원하는 모습과 그 때에 주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시각으로 바라보시며 내가 정해놓은 때에 얻어져야 좋을 거 같은데, 욕심과 우상숭배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거룩한 자가 되도록 우리 인생의 시각을 개입하고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찾아보며 세상의 압박 가운데 영향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믿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나요?
2. 자기 증명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vv.2-5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유대인들은 삼대 중요한 절기를 지킵니다. 초막절, 유월절, 맥추절인데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리는데 광야에서 살았던 그 기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신 은혜를 기념해 유대인들이 몇 일간 장막을 치고 초막절을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렇게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