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인간은 많은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 중 긍정적 감정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대부분 슬프고 억울하고 우울하고 화가 나서 자신과 주변을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왜 심리학 수업이 아닌 설교를 통해 감정을 배워야 할까요? 감정이란 단순히 느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의 뿌리는 영적입니다. 말씀으로 감정에 대해 바로 배워야 적절히 반응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직면하지 않고 감정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친밀한 관계가 깨어지며 또한 개인의 삶의 질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뿌리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는 것일까요? 오늘은 감정 시리즈 첫 번째 시간으로 부정적 감정의 뿌리가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정적 감정의 뿌리는 무엇인가요?
1. 욕망입니다. vv.6-11
첫 번째로 부정적 감정의 뿌리는 욕망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입니다.
[6]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블레셋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한 명이 나랑 싸워서 이기면 내가 너희의 노예가 되겠다, 너희가 지면 너희가 노예가 되어라’라고 선전포고를 합니다. 사실 이 일을 위해 사울이 존재했습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큰 이스라엘의 장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평균보다 머리 하나 크다고 2m 70cm의 거인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사울 또한 백성과 같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할 상황에서 구원자가 등장합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린 소년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 기적 앞에 가장 기뻐해야 할 사람은 사울입니다. 자신이 싸웠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윗이 나서주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왕 사울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왕이 대열 앞에서 전투를 이끈 대표자로, 실제로 싸우지 않고도 영광을 누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윗을 칭찬하자 이제까지 영광의 흥분의 감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8절과 9절에 사울이 느낀 감정들이 무엇인가요?
[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감정이 요동치며 처음 시작된 감정은 불쾌감입니다. 불쾌란 좋은 것을 경험하던 기분이 사라지는 순간 드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심히 노하였습니다. 분노는 원하는 것이 좌절되었을 때 일어납니다. 그뿐 아니라 시기와 질투가 같이 튀어 나왔습니다. 승리로 기쁘던 사울은 순식간에 불쾌하고 분노하고 시기하는 불안정한 영혼이 되어버립니다.
감정의 무서운 점은 우리가 불쾌하고 끝나고 화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하지 말아야 될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까운 관계에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말을 본능적으로 뱉게 됩니다. 이런 감정이 어디까지 나아가는지 10절과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악한 영의 지배 하에 사울은 영적으로 심각하게 연약해진 상황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악한 영을 부리시나?’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악한 영조차도 하나님의 권능의 통치 아래 지배당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악한 영이 존재합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이 악한 영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인생을 파괴하고자 하면 그에 대적할 인간이 없습니다. 악한 영은 영혼이 망가져 버린 사울을 지배해서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악한 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정하신 수준 안에서만 고통을 당했는데, 이 고통을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 다윗의 찬양이었습니다. 사울은 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다윗이 노래를 부르면 악한 영이 떠나가 자유를 얻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개인적 구원자이자 나라를 구하는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창 종류가 두 가지입니다. 큰 전쟁에는 키보다 훨씬 큰 장창으로 싸우고, 1m 정도의 단창은 가까운 거리에서 던져 사냥을 하거나 가까운 적과 싸운 것입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던진 단창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다윗은 두 번이나 피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타락과 파괴와 고통과 실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상황들이 벌어졌나요? 감정 때문입니다. 모든 부정적 감정의 시작이 7절이었습니다.
[7] …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
한 사람의 무서운 타락이 사람들의 말 한 마디에서 시작되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어떻게 말 한 마디로 감정이 요동하여 은인을 살해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5절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
죄는 눈에 보이는 어떤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의 결과일 뿐 죄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돼서 영혼의 공허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내가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죄는 영적 상태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죄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아 영혼이 공허하여 그 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공허를 메꾸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게 됩니다.
살인, 폭행, 사기, 이 모든 죄의 근원은 상대를 짓밟아서라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욕망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욕망을 다 이룰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절대적 왕은 못 되더라도 내 영역에서만큼은 왕이 되기 원합니다. 그것을 ‘왕 노릇’한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왕 노릇에 대해 마가복음 10장 4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막 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임의로 주관’하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높아지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사울이 이렇게 분노하며 다윗을 죽이려고 한 본질 안에 무엇이 있나요? 왕 자리를 뺏기기 싫다는 욕망이 이 반응을 이끌어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끊임없이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본질이며 뿌리입니다. 모든 부정적 감정은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이 좌절될 때마다 드러나는 결과물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 화가 나고, 남을 더 비난하고,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원수들을 저주하는 시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니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놓고 이런 기도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정을 느끼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아님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부정적 감정들은 영혼의 창문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상태를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영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인식적 차원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의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창이 바로 감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안에서 부정적 감정이 요동칠 때, 하나님처럼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죄의 욕망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식할 뿐 아니라 그 때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해야 합니다.
똑같은 환경과 똑같은 사람을 대해도 어떤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나만 화가 납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 나만 슬픔에 사로잡혀 있고 불안하다면 이 사람의 영혼 안에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심각한 영적 부조화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죽으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음의 주인이 되셔서 내가 다스리지는 못하는 영역까지도 다스리시는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정적 감정들을 마주하실 때 죄인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영혼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좌절되어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이 다스려 달라고 간구하는 영혼에게 예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부정적 감정의 뿌리는 무엇인가요?
2. 두려움입니다. vv.12-14
두 번째로 부정적 감정의 뿌리는 무엇인가요? 두려움입니다. 12절입니다.
[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사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함께 하셨고, 사울과 함께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커지자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이 때 사울의 두려움이 시작됩니다.
두려움도 물론 감정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다른 표면적 감정과 달리 근원적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욕망과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욕망하는 어떤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혹은 가진 것을 빼앗길까봐 생기는 감정이 두려움입니다. 원하는 것이 간절할 수록 두려움도 같이 커집니다. 사울이 왜 두려워하나요?
다윗을 죽이면 자기가 욕망하던 왕권이 안전할 줄 알았는데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다윗 배후에는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과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자,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두려움은 부정적 감정들의 원인으로, 불안, 우울, 슬픔도 두려움의 부차적 감정들입니다.
즉 욕망과 두려움이 영혼 안에서 기관차처럼 움직이면서 영혼을 파괴하고 문제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커지자 사울이 선택한 방법이 무엇인가요? 회피입니다. 13, 14절입니다.
[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다윗은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기에 함부로 죽일 수는 없고 해서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보내버립니다. 스물도 안 된 소년을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로 보내어 용맹한 군인들을 통솔하도록 맡기면 거기서 실패하여 제풀에 꺾여 나가겠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하게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도 두려운 대상이 있을 때 회피합니다. 그러나 일을 크게 만들까봐 언급하지 않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방법입니다. 결국 욕망과 두려움을 직면하여 그것이 영혼의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울이 그러했듯, 고통과 타락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도 사울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쌍둥이처럼 움직이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드렸나요? 두려움입니다. 내적인 욕망과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나누다 보면 굉장히 범위가 넓겠지만 다섯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욕망과 두려움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게 됩니다. 사실 한 사람은 모든 욕망의 카테고리에 다 걸쳐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첫 번째 보편적인 욕망은 자유에 대한 욕망입니다. ‘나 혼자 할 거야. 누군가 내 위에 있는 것이 싫어.’ 이런 사람은 어떤 두려움이 클까요? 누군가 나를 통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며 권위에 대해 반발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조직생활을 희생해야 합니다. 조직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즉 관계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유라는 욕망이 이끌었지만, 그것이 압박에 대한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작용하면서 결국 조직에서 도태되고 공동체 생활을 하지 못하고 관계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두 번 째로는 쾌락욕이 있습니다. 쾌락에 대한 욕망이 강하면 심심하고 지루한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니까 즐거움이라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어느 지방의 국수가 맛있다고 하면 서너시간 차를 타고 가서 국수를 먹어야 되는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희생할까요? 자기 돈과 시간과 체력을 고갈시킵니다.
요즘은 쾌락욕을 가진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는 도구, 스마트폰이 등장했습니다. 이 컨텐츠들은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낼 수록 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심리학자까지 동원해서 알고리즘을 계속 제공합니다. 특히 새로운 포맷인 쇼츠는 짧은 영상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특히 시간, 돈, 체력이 없어도 즐길 수 있는 손 안의 놀이동산인 것입니다. 그러나 밤새 핸드폰을 보다 학교에 간 학생, 직장에 간 직장인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결국 남의 지적과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에서 제대로 된 성취를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세 번째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인정에 대한 욕망입니다. 인정에 대한 욕망이 클수록 소외에 대한 두려움도 동시에 큽니다. 친밀감은 좋은 것이지만 이것이 욕망으로 인한 것이라면 이런 사람은 자기 시간을 희생해야 됩니다. 혼자서는 시간을 보낼 수 없고, 혼자 있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누가 나를 사랑할까? 사람에 대한 시선 때문에 늘 불안하고, 누군가 나를 좋아하면 달라붙고, 그 사람이 불편해하면 상처입고, 이것이 반복되다 관계가 파괴됩니다.
네 번째로 통제욕입니다. 통제욕이 강한 사람은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큽니다. 끊임없이 통제하려는 이유는 사실 불안함, 불확실성이 싫어서입니다. 이런 사람의 중요한 가치는 훈련, 연습, 계발입니다. 늘 자신을 채찍질하고 남에게도 그 잣대를 요구합니다. 이런 사람을 지배하는 감정은 불안입니다. 계획된 대로 안 되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끊임없이 남을 비난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공과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고 힘을 가지고 싶은 결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강력해집니다. 이런 사람의 인생의 가치는 능력입니다. 이들은 관계를 희생하게 됩니다. 성공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니까 친밀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의 욕망을 위한 도구니까. 착한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 내 길에 방해가 되는 이들을 향해서는 분노합니다.
결국 살면서 경험하는 감정들은 내적 욕망과 결부된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여러분을 주도하는 욕망은 무엇인가요? 어떤 두려움을 자주 느끼시나요? 욕망과 두려움을 모르겠다면 어떤 감정을 자주 느끼시나요? 감정에 대한 설교를 통해 여러분의 감정을 어떻게 영적으로 이해하고 다루는지를 배워 영적으로 성숙하는 기회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