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9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인간 관계를 깨트리는 가장 중요한 감정은 분노입니다. 사람들은 왜 화를 내나요? 자기중심적 욕망의 기준이 강한데 충족되지 않아서, 즉,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되지 않아서 분노합니다. 분노가 외부의 사람을 향하면 언어적, 감정적, 심지어 육체적 폭력의 형태를 가지게 되고 외부의 환경을 향하여서는 불평과 원망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되면 우울이라는 병리적 증상을 띄게 되며, 우울은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반복하는 무기력으로 드러납니다.
결국 누군가가 사람을 자주 미워하고, 상황에 대해 불평하거나, 반대로 밖으로는 화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자신 안에 꾹꾹 담아 두고 있다면 그 내면의 뿌리가 분노임을 인지해야 합니다.
시중에는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 정신의학신문에 정신과 의사가 기고한 다섯 가지 방법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첫째, 화날 때 그 자리를 피해라. 둘째, 숫자를 세라. 셋째, 십자가나 묵주를 돌리며 참으라. 네 번째, 세로토닌 분비를 위해 탄수화물을 먹으라. 다섯 번째, 도파민 분비를 위해 유산소 운동을 하라.
이 방법들로 분노를 다스릴 수 있나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분노의 근원은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른 말로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분노의 영적 근원은 무엇인가요?
분노의 영적 근원은 무엇인가요?
1.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죄성입니다. vv.1-4
첫 번째로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죄성입니다.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사람들은 요나서를 구약의 선교의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죄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책입니다. 그래서 요나서에 반복해서 나오는 단어가 ‘선’과 ‘악’입니다. 한글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원어로 읽으면 선과 악이 요나서의 중심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금 읽은 1절의 ‘매우 싫어하고’가 히브리어에는 ‘악한 악을 발하며’입니다.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를 두 번 반복함으로 요나가 악을 표출한 것이 한 번이 아니라 아주 강력했음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요나가 악한 악을 발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요나가 선이라고 정한 것을 하나님이 깨트리시고 요나가 악이라고 정한 것을 하나님이 행하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요나에게는 악인가요? 요나의 원수 니느웨를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멸망을 간절히 바란 요나의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나요? 창세기 3장 5절입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죄의 본질은 악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중심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무엇인가요? 선과 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과 악을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과 악의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많은 문제는 사라집니다.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라갈 필요가 없어집니다. 돈을 쫓고, 지위를 숭앙하고, 학벌을 갖추는 데서 오는 갈등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은 시시하고 내가 유명해지고 내 가족이 힘을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인간의 분노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돈을 좋아하지만 원하는 만큼 돈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즉 욕망은 존재하는데 인간이라는 한계로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나도 이런 상황입니다. 요나가 원하는 것은 니느웨의 멸망, 곧 민족의 복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은 무엇인가요? 성경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11절입니다.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원수로 여겼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악행을 하면서도 그것이 악인지 모르는 수십 만 명을 향한 하나님의 선과 요나의 선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요? 두 선이 충돌하면 인간의 선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요나는 마음의 소원처럼 니느웨를 멸망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생각하는 ‘악’을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하자 분노가 치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성품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우리가 볼 땐 쓰레기 같은 인간, 반역하여 죄를 지은 인간마저도 하나님의 일관된 반응대로 사랑하셔서 우리와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을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좋아 보이는 것, 이익이 될 만한 것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모른 것이 아닙니다. 2절입니다.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에 심판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셨고,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을 알고 도망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요나를 잡아다 바다에 집어넣다가 꺼내서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누구시라고 확신했나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이 커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기에 도망갔습니다. 요나서 2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요나가 빠지자마자 건지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나는 바다 밑까지 내려가 풀이 온몸을 감고, 코로, 귀로 모래가 들어가고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입니다. 그 요나의 기도가 요나서 2장 4절, 6절에 있습니다.
욘 2:4, 6 [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 [6] …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제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저를 구원하시다니 감사합니다. 이 말 뒤에는 ‘저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 나쁜 놈들은 절대로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모순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이 ‘서로 사랑하라’임을 이해한다면 어떻게 누군가를 계속 미워할 수 있나요? 결국 미움의 본질은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하라고 하셔도 내가 미워할 사람은 미워할 거야’라고 결정하는 내가 옳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아니까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며, 힘이 세시며, 바다를 요동케 하시는 분이심을 아니까 하나님과 경쟁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안전한 곳에서만 화를 내지, 자기보다 센 자에게 화를 내지 못합니다. 요나 역시 하나님께 화를 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향해 쏟아냅니다. 3절입니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선지자가 내 뜻대로 안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경쟁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소리 지르고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4절입니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옳으냐’가 바로 요나서에서 반복되는 ‘선’입니다. 선과 악의 싸움인 것입니다. 요나의 선은 무엇인가요?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건 여자건 관계없이 내가 미워하는 집단에 속한 모든 인간이 다 죽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가끔 일본의 지진 기사 밑에 일본 전체가 물에 잡겨서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댓글이 있기도 합니다. 한국이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것이 벌써 백년이 되어 가고, 지금 일본 사람 중 직접 한국 사람들을 괴롭힌 사람이 거의 없고, 댓글을 단 사람이 직접 피해를 본 것이 아닌데도 쉽게 그런 무서운 말들을 씁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어떤가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 하나님께는 긍휼의 대상이었던 그들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이었습니다. 지금 무엇이 더 악한가요?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 죄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였으면 좋겠고, 하나님 앞에서 분노를 낼 수 없자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모습이 ‘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 하고자 하는 죄성을 무엇보다 심한 악으로 여기십니다. 분노는 그래서 나쁜 감정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노할 때마다 사람과 환경을 핑계로 대면서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분노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노릇 하려다 문제가 생겼구나. 내가 하나님이 아니구나’라고 영적인 근원에서 회개하셔야 합니다. 이 방법 외에는 우리는 죽을 때까지 분노의 무서운 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분노라는 감정을 저도 인생 내 경험했습니다. 저는 밖으로는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제게 분노가 큰 문제라고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유학을 가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었는데 원하지 않는 상황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는 어려워지고, 둘째가 태어나고, 아내는 아토피로 온 몸에서 피진물이 나고, 저 또한 알러지로 귀에 물이 차서 1년 내내 약을 먹고, 밤에는 기침으로 잠을 못 자는 등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왜 무능하고 가난하며 힘들어야 하는지 분노가 쌓이다 점점 무기력해졌습니다. 그러다 상황을 극단적으로 촉발시킨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삶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첫째가 새벽마다 깨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며칠은 그러려니 했는데 꼭 같은 시간에 깨서 울기를 한 달 이상을 하자 일상이 망가지고 잠을 못 자면서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작정하고 두시까지 버티는 날에는 꼭 네 시쯤에 일어나자 분노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게 다 화가 났지만 가장 화 난 대상은 사실 하나님이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기도를 안 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돈이 없어서 매일 몇 시간씩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또 아이가 깨서 우는데 시중을 들 힘도 없어서 방을 나와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저는 하나님께 삿대질했다는 사람들을 얕보았었는데 그 날은 견딜 수가 없어서 왜 나만 쫓아다니면서 괴롭히시냐고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유학을 왔는데 왜 그러시냐고 따지는데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으신 질문을 물으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분노가 너무 정당했습니다. 유학 왔는데 아내는 아프고, 내가 밥하고, 내가 애 보고, 돈은 없고, 공부는 못하고, 화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제가 신세한탄과 자기변명을 계속하자 다시 한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그 때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나는 돈이 있어야 하는게 당연하고, 왜 나는 나와 가족이 건강해야 하고, 왜 나는 애들이 잘 자고, 왜 나는 외국에 와서 쉽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훨씬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도 많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하기도 하는데, 나는 내가 잘 살아야 되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화가 났던 것입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데, 내가 당연한 것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화가 났던 것입니다. 제가 그 결론에 이르러서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맞습니다. 하나님 노릇이 마음대로 안 되어서 고통스럽습니다. 제가 좋다고 생각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고통스럽고 그래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은혜를 내려 주세요’ 기도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확증이 어떻게 왔을까요? 정확히 그날부터 아이가 새벽에 깨지 않았습니다. 저 때문에 새벽마다 딸을 깨우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사건이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물론 그 다음에도 화난 적 있고, 하나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제 안에서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또아리 틀던 분노의 게이지가 신기할 정도로 낮아졌습니다.
정말 하나님 노릇하려던 죄악의 깊은 종기가 터져서 빠져나간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분노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하나님만 하나님 자리에 올려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분노의 영적 근원은 무엇인가요?
2. 자기중심적 욕망입니다. vv.5-11
두 번째로 분노의 영적 근원은 무엇인가요? 자기중심적 욕망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났으면 하나님 마음을 알아야 되는데, 지금 요나는 여전히 무엇을 기대하나요? 5절입니다.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라고 고백해 놓고 마음에서는 절대로 원수가 망하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이 언제 망하나 보려고 높은 데 올라가서 천막을 지은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개입해 오십니다. 6절입니다.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서에서 요나가 처음으로 크게 기뻐 합니다. 히브리어 반복법으로 1절에서 ‘악한 악’을 쏟아내던 요나가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왜 기뻐하고 기뻐했나요? 머리에 그늘이 져서 덥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요? 욕망이 충족되었습니다. 중동의 더운 햇빛이 얼기설기 초막을 뚫고 내리쬐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박넝쿨로 덮으시자 그늘에서 시원함을 맛본 것입니다.
성경은 ‘예비하다’를 여러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도 예비하셨고, 박넝쿨, 벌레,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십니다. 이것들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요나 한 사람의 본질의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시는 데 이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요나가 기뻐하는 이유, 또한 그가 강렬하게 분노하는 이유가 되는 요나의 자기중심적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가 또한 ‘악에서 구원하려’와 같은 뜻입니다. 괴로움이란 단어가 ‘악’이라는 히브리어 ‘라아’이며, ‘면하게 하다’가 ‘구원하다’입니다. 즉 단순히 땡볕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 무엇을 예비하셨나요? 7절입니다.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처음부터 없었으면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누리다가 빼앗기면 고통이 더 심해집니다. 요나는 성이 멸망하는 것을 보려면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데 하루 만에 그늘이 사라지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시고 8절에 무엇을 또 준비하십니다.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물론 외적으로 뜨겁지만 지금 요나는 자기 욕망이 좌절되고,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행하시고, 내 마음대로는 살 수 없고, 복합적으로 내면 안에서 파괴적인 힘이 합쳐지며 마음에서 불이 치솟은 상황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9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박넝쿨과 요나의 관계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보내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심었나요? 애썼나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다가 하나님이 가져가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화가 났는지 죽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은 어쩌면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인데, 그 혜택을 잃어버리면 자기중심적 욕망 때문에 분노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노력으로는 자기 욕망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내 욕망보다 훨씬 크고, 채워줬을 때 만족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한다는 것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비하면 너무 좀스럽고 작습니다. 지금 요나는 박넝쿨을 다시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요? 박넝쿨을 향한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악인까지 덮는 긍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0절과 11절에 말씀하십니다.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우리 또한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물질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원이 낮은 수준입니다. 마음을 물질로 채울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삽니다. 선행도 하고 기부도 합니다. 그러나 그 근원에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물질이건 비물질이건 욕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나의 좁은 시각을 벗어나 하나님이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보시는지, 그 하나님의 시선에 동참하게 될 때, 이 땅의 것을 바라보며 욕망에 따라 일희일비하던 인생을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사소한 욕망을 누군가 들어주지 않아서 화나던 작은 인생에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 마음처럼 확장되어 원수까지 품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