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본질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예배는 주일에 와서 드리는 공예배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함께 드리는 외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혼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경외하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부부가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싫어하고 서로 비난과 원망만 하면서 말로는 사랑한다고 한다면 어느 쪽이 진심일까요?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겉으로도 표현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 예배는 무엇인지, 어떻게 예배해야 되는지를 배울텐데 오늘은 예배의 영적 본질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배의 영적 본질은 무엇인가요?
1.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v.1
그렇다면 예배의 영적 본질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a]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는지를 계속 이야기합니다. 로마서의 본질은 인간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의 죄는 사회적 범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아담의 본성이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 없이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 자체가 죄이며 그 결과는 영적 죽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죽을 자들에게 무엇이 주어졌나요? 하나님이 놀라운 자비로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즉 ‘그러므로’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으므로’ 마땅히 해야 할 반응이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로 생명을 받은 자가 해야 할 반응이 무엇인가요? 1절 하반절을 보시면
[1b]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의 본질은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위하면 제물은 죽이고 피와 모든 것을 태워서 하나님께 번제로 바쳐 제물이 대신 죽고 우리가 살아날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물이 될 수 있나요?
제물이 되는 것은 ‘이전에 다른 것과 관계 맺던 것을 끊어버리고 하나님과만 온전히 관계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죄와 나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선언하고, 이제 나는 하나님께만 헌신된 자라는 반응이 바로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산’ 제물로써, 살아있지만 삶의 방향성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삶에 영적으로 깊게 뿌리 내려서 우리로 끊임없이 예배하는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사람만이 예배자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은 예배를 드립니다. 한글의 ‘예배’는 ‘예를 갖춰 절하다’는 뜻으로 원문의 의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샤아’는 ‘경배의 대상이 되는 높은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하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프로스큐네어’도 똑같습니다. 왜 몸을 굽혀 절할까요? 그 존재가 최고의 존재이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나의 행위로 높이는 것입니다. worship이라는 영어 단어 또한 이 의미를 나타냅니다. 가치를 뜻하는 ‘worth’와 드리다 ‘ship’ 즉 예배는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한 반응입니다.
세상 사람도 다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예배합니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으로 바뀌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 자신을 예배하고 돈과 세상을 예배하며 마치 하나님처럼 살려고 합니다. 죄를 예배하던 모든 사람 중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사실 주일에 채비하고 나와서 먼 길 오는 것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텍사스에는 성도의 편의를 위해 30분 안에 예배를 마치겠다는 것을 내세운, 이름 자체가 Thirty Minutes Worship Church도 있습니다. 이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은 시간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왜 주일에 모이나요? 설교 때문이라면 영상으로 보면 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중에 따로 만나면 되고, 밥이 맛이 있다면 훨씬 맛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분이심을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인정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싸움이 존재합니다. 욕망이 이끄는대로 살라고 하는 세상의 소리와 싸워가며 나를 예배하던 자리에서 하나님 예배로 변해나가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며 영적 근원입니다.
예배의 영적 본질은 무엇인가요?
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v.2
두 번째로 예배의 영적 본질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2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2a]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예배 가장 방해되는 것은 세상의 영향력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은 채로는 절대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세상’은 단순히 세상이 아니라 세상과 결부된 영적 힘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세상 사람처럼 산다’라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영적 영향력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엡 2:2-3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세상 풍조와 세상 배후에 있는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영향입니다. 세상의 영향력이 왜 항상 매력적인가요? 3절에 있듯 마귀는 세상을 우리 육체의 욕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행을 따라가기 시작하면 알지 못하는 사이 마귀의 영향을 받게 되고 욕망을 이루는 길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 길이 진정한 행복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의 트렌드와 영향력은 끊임없이 변하고 마귀는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우리도 사실 세상의 영향력 가운데 살아갑니다. 세상과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스마트폰을 쓰지 않을 수 있나요? 많은 부분에서 세상이 살아가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중요하는 것은 분별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않고 끌려가면 마음이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기 시작해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지난주 신문을 보니 요즘 스마트폰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나온 지 오래되었지만 최근에 짧은 동영상의 중독이 강력해지며 내용은 자극적이고, 무한 스크롤에 빠져서, 끊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의 절반을 갇혀 지내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 중독적 영향력을 통해 우리를 무언가에 깊이 빠지게 만듭니다.
쇼츠를 10시간 보고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괴감이나 잠을 못 잔다거나 일상에 방해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우리의 영혼 안을 침범하며 마음이 어두워져 영적으로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예배를 못하게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의 중심에서 밀려나시는 것입니다.
분별하셔야 합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돌아보셔야 합니다. 왜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가치 있는 분이라고 인정하고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의존할 때 우리에게 진짜 만족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세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다음 단계가 가능합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2b]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제서야 하나님의 뜻이 분별이 됩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세상에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 생각을 거의 하지 않다가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서만 하나님 뜻을 알고자 합니다. 대학, 취직, 결혼 등. 이것은 점쟁이를 찾는 마음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미래의 운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의 영향력을 받아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은 사람은 내게 유익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착각합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게 정말 선한 것인가요? 로또에 당첨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90%는 로또에 당첨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쾌락의 쳇바퀴 이론 때문인데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고 인생은 쳇바퀴처럼 돌아갑니다. 그런데 순간의 짜릿함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싶어서 자꾸 쾌락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인간관계의 파괴입니다. 가까운 친지부터 모르는 사람까지 돈을 달라고 붙기 시작하고 거절하면 비난하는 등 배신감과 실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되고도 망하지 않는 10%는 액수가 크지 않아서 일상이 무너지지 않거나 또는 절제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은 너무 드물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는 유혹의 광풍을 불어옵니다. 이런 바람에 휘둘리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처럼 추락합니다. 또한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참 예배자가 되면 세상이 아무리 요동하고 이런 저런 소문이 들려도 유혹 받지 않고 평정하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제까지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기억하며 놀랍다 감사하다 은혜이다 라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남은 저렇게 부자 되고 잘 나가는데 하며 원망과 불평을 내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여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예배의 본질을 회복한 사람만이 온전하고 충만하고 선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욕심 때문에 사실 개척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돌아보면 제 안에 있는 욕망은 안정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질상 안정을 너무 열망했습니다. 안정되기 위해서 절대 개척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개척 생각을 안 하니까 하나님도 청빙가게 하시겠지 당연하게 생각했고, 미국에서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묵상하면서도 당연히 큰 교회를 꿈꿨습니다.
그런데 제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2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하면서 깨달은 것이 내가 내 욕심으로 마음을 닫아두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데 고통스러운 2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가 다 내려놓고, 하나님 그저 구원해 주심이 감사합니다, 하는 자세로 나아갔더니 그때 하나님이 순식간에 개척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개척을 하고 1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보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청빙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며 너무 감사합니다. 저랑 가장 친하던 목사님 두 분이 청빙을 가셨는데 5년, 10년 안에 교회를 그만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고통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암에 걸리시거나 혹은 나오는 과정에서 심하게 싸우고 갈등하다가 마음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저는 살짝 아픈 정도가 아니라 아마 인생 자체가 망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가장 맞는 길로 주셨습니다. 제가 기존 교회에서 지난 10년의 설교를 했다면 아마 살해 협박을 받았거나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이 이단아가 된 것처럼 이단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와서 보니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었지만 무엇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을 방해했나요? 안정에 대한 욕망, 내 인생은 절대 위험하기 싫어, 하나님도 내가 정한 길로 나를 보내시는 것이 맞아, 라고 생각하던 잘못된 생각의 틀이 저를 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받아서 ‘나는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정해놓은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유일하게 예배해서 생긴 결과가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여러분 인생의 틀이 되고 욕망이 된 것입니다.
본질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서야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너무 좋아 보여서 내려놓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진짜 선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생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