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살다 보면 이 세상이 망가져 있고 엉망진창인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세상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 또한 회복이 안 될 만큼 망가진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합니다. 특별히 관계의 문제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관계를 풀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면 절망하고 낙담합니다.
이것이 혼자만의 문제라면 상관이 없지만 다른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이 다 엉망진창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소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 가족의 이야기가 본문에 나옵니다.
노아 가족은 홍수로 인한 심판을 피했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고 즐거웠을까요? 아닙니다. 창문도 없는 방주 안에 1년 넘게 갇혀 있는 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고 모든 세계는 다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그 후에 세상에 나왔을 때는 더욱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물에 잠겨 진흙이 되었다면 가장 많아지는 것은 모기나 파리 같은 곤충입니다. 셀 수 없는 해충들이 앵앵거리고 시체는 사방에 널려 있고 냄새는 지독하고 푸른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방주에 있을 때보다 더 절망적이지 않나요?
본문은 하나님이 어떻게 엉망진창이 된 상황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망가진 세상이 회복될 수 있나요?
어떻게 망가진 세상이 회복될 수 있나요?
1.제물을 바치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v.20
첫 번째로 제물을 바치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20절 말씀입니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제물을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로 말미암은 처참한 결과가 바로 인간의 죄악 때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왜 시작되었나요? 창세기 6장 5절과 7절을 보시면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창 6:5, 7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
사람이 죄를 지은 결과로 모든 생물까지 쓸어버리시려고 홍수를 내리신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왜 짐승과 새까지 멸망했나요? 짐승들이 사람의 통치를 받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책임자가 인간이고 이들은 인간의 영향력 아래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란 어떤 행위를 말하나요? 물론 인간의 죄악 이야기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은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의 근원에서 나온 것이기에 한두 가지 행위를 벌주거나 막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법이 있나요? 아무리 법으로 죄를 제재해도 사람들은 교묘하게 법을 비켜갑니다. 그래서 새로운 범죄가 생겨납니다. 법은 인간의 무서운 행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법이 단순히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시면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존재적으로 거룩한 모습, 죄가 하나도 없는 모습입니다.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관계적으로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거룩과 사랑으로,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자기중심적인 공허를 채우려는 열망으로 인해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충만하시고, 죄와 관계가 없으시니, 그 충만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세워 모든 것을 사랑으로 돌보는 존재로 만드신 것, 이것이 바로 통치입니다.
즉 인간의 역할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영원히 텅 비어버린 존재가 되었고, 이것은 욕망과 두려움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으로 인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나의 유익을 위한 탐욕적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명하셨는데 인간은 서로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관계적인 문제는 사랑하지 않고 도구로 볼 때 일어납니다.
단순히 인간관계뿐 아니라 세상도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니까 이 세상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어떤 상태가 되었는지 로마서 8장 22절이 이야기합니다.
롬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소리를 듣지 못해서 그렇지 영적으로는 세상이 탄식하고 고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들이 노래한다고 생각하지만 매연, 소음, 잡아먹히고 갇힐 불안함으로 고통의 울음을 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게다 전 지구의 고통의 여파를 우리는 경험합니다.
지난 주만 하더라도 브라질 체감 온도가 60도였다고 합니다. 길거리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산불, 홍수, 가뭄이 반복되고 극화되고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계속 화석 연료를 사용하면서 하늘에는 구멍이 뚫리고 온도가 점점 올라가버린 환경 재앙은 다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라는 존재를 열망합니다. 살다 보니 내가 연약하고, 나의 능력을 뛰어넘는 분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 그게 누구든 관계없습니다. 그 욕망을 가진 채로 신을 섬기니까 교회에 온 많은 사람들도 여전히 하나님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우상 정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큰 모욕입니다. 거룩하고 사랑 많으신,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 죽여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을 향해 부처나 달을 섬기는 똑같은 태도로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온 세상은 결국 인간의 탐욕과 죄악으로 파괴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가운데 노아가 경험한 것 같은 세상이 정말 망가졌고, 내 삶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왜 깨닫기를 원하시나요? 그것을 깨달은 자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망가졌고 회복 불가능하다고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멀쩡한 것 같다가 문제가 터져야만 깨닫게 됩니다. 젊고 건강한 사람은 약함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나이가 들고 아파 봐야 인간의 약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듯 죄도 그렇습니다.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우리는 죄악의 파괴력과 영향력을 인지하게 됩니다.
세상은 지금 자본주의가 대세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완벽히 건강하고 온전한 체계인가요? 한국은 경제력 10위로 가난에서 벗어났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한국보다 잘 살지 못해서 크게 고통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폐해가 무엇인가요?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현재 인구의 1%가 전 세계 부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더 확산되는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10년 후에 이들의 부는 70%까지 늘어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나머지로 나눠 써야 하는 것입니다. 부익부가 증가될수록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밥을 굶거나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없지만 동남아나 인도만 가도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잘 살고 누리니까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인간의 관계에서 고통하게 되는 것도 죄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더라도 문제가 터졌을 때는 근원의 죄를 직시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문제 있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에 정신 분열 증세를 가진 초등학생이 소개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회장도 하고 모범생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일주일씩 잠도 안 자고, 몸도 불수의적으로 움직이고, 환각도 보고 환청도 듣고, 엄마 아빠도 몰라보고, 모두를 의심합니다. 제가 잠시 보았을 때는 어느 지역, 어느 시대나 1%의 사람은 걸린다는 정신분열증 같았습니다.
그런데 2화에 보니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엄마의 영향이 컸습니다. 엄마의 불안이 높아서 사사건건 아이를 통제해 왔고, 아이는 착하니까 엄마 마음에 들고자 자신의 모든 욕구를 억누르며 말을 듣다가 그 분노가 응집된 어느 순간 자아가 분열된 것입니다.
아이에게 자율권을 주라는 처방을 받고 솔루션을 진행하는데 아이의 문제 행동은 금방 좋아졌는데 반대로 엄마가 힘들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의학적 영역이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차라리 견뎠는데 아이가 반항하고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 이 엄마에게는 너무 불안해서 차라리 정신이상이었다고 생각할 때가 편했다는 말을 할 지경이었습니다. 즉 아이를 통제하는 것으로 자기의 안정과 행복을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평생 박제되고 말 들을 것을 각오하더라도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문가의 관찰과 진단으로 자신의 지배욕과 통제욕이 드러난 것입니다. 엄마도 아이도 알지 못한 채로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절대 예배의 자리로 나갈 수 없습니다. 예배에 왜 희생이 필요한가요? 죄악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우리는 온전히 예배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 잘 되고 있고,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면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사실 인생의 많은 문제가 우리에게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힘들고 어렵다고 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깊이 파 보면 서로의 죄악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엄마의 두려움, 아빠의 통제, 자녀의 반항, 서로의 분노가 얽혀서 서로를 손가락질합니다.
이 근원 안에는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도와줘야 해. 나만을 위해 존재해야 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어야 해’라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니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분노하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나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했구나’라고 고백하는 사람만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분 앞에 나아가 그분의 희생으로 인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죄의 해결 방법은 히브리서 9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고는 정결케 되는 방법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전문가가 많지만 영적으로 보면 모든 문제의 근원에 죄가 영향을 미치고 이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해결하시기 위해 히브리서 13장 12절에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이 저주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는 이제 저주에서 자유롭고 거룩한 자가 되어 온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이전에는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어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3장 25절을 보시면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신을 찾지만 예수를 통하지 않고 부처, 알라, 일월성신에게 가서 원하는 것을 빌었는데 하나님이 예수의 피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부터 16절입니다.
히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중보자 예수님을 붙들면 된다는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그 분은 우리를 모르고 우리와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고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 망가져버린 인생에서 하나님만이 답이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죄 때문에 이렇게 됐군요, 나의 죄악의 문제였군요’라고 고백하며 ‘저는 불가능하지만 예수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덧입기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가 바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에 하나님은 응답하셔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 중에 새 소망과 새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망가진 세상이 회복될 수 있나요?
2.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입니다. vv.21-22
두 번째로 어떻게 망가진 세상이 회복될 수 있나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입니다. 21절 상반절 말씀을 보시면
[21a]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노아가 드린 제물은 짐승이었지만 하나님은 노아의 행위를 보시고 앞으로 일어날 예수의 십자가의 제물을 떠올리시며 받으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든 사람들이 드렸던 번제와 희생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것이고, 구약의 성도들도 그래서 예수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영적인 하나님께는 시간이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양을 태우는 냄새를 좋아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라는 모형을 통해 예수를 받으신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줄 것임을 제사의 형태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즉 노아도 예수로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무엇을 결심하시나요? 21절 하반절입니다.
[21b] …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왜 이런 결심을 하셨나요? 예수로 생명을 주실 길을 이미 예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합니다. 본능 자체가 자기중심성이고 나이가 들면서 교묘해지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감추고 사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멸망시키는 대신 해결 방법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자연의 질서입니다. 사계절이 바뀌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자연이라고 부르지만 이런 싸이클이 없이 변하지 않는다면 지구는 멸망하고 인류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지구가 왜 살짝 기울어졌나요? 그렇지 않으면 지구가 태양의 빛을 받는 것이 너무나 제한적이라 온도가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도 정확하고 정교하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조금만 틀려져도 문제가 생깁니다. 달이 지구에 조금만 가까워도 인력으로 인해 쓰나미가 매일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정확히 운행하십니다. 이 질서가 사라지는 순간 온 세상은 혼돈이 올 테고 이것이 곧 죄의 상태입니다.
인간은 원래 완벽한 질서 안에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중력이 있어서 우리가 걸어 다니듯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 것이 아닙니다. 보자마자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소중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우리 안에 욕심이 없이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여기가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각자의 기준으로 남을 늘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듯 최고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왜 내 맘에 안 들어? 라고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근원입니다. 이것이 혼돈이고 죄가 가져온 파괴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서 시작된 혼돈으로 인생 전체가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질 때 두려움이 몰려오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권력과 힘과 꾀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가진 것으로 절대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제자들이 당한 폭풍입니다. 마태복음 8장 24절부터 27절입니다.
마 8:24-27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직업이 어부였습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갈릴리에서만 수십 년째 물고기를 잡던 전문가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가로가 12km, 세로 20km 정도로 날씨가 맑으면 끝이 보이는 호수입니다. 그런데 폭풍우가 부니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형입니다. 잘 살아온 것 같았는데 해결 방법이 없을 때, 내 방법을 포기하고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믿음 없음이 드러나고, 믿음이 없으니까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이 분이 누구시지?’ 하고 반응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 기적이 일어나면 우연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꾸 믿음이 성장할 기회를 주십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났더니 나중에 제자들이 똑같은 상황에서 무엇이라 반응하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통치하셔야 인생의 혼란과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을 경험하고 예배하는 자리로 부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것을 연습해야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서 요한계시록 15장 2절과 3절처럼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습니다.
계 15:2-3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유리 바다에 왜 불이 섞여 있나요? 계시록은 상징적인 그림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바다는 폭풍이 치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땅에서 비바람이 치면 집으로 들어가면 되지만 바다에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바다가 crystal-like sea, 유리창처럼 잔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바다는 왜 불이 섞인 바다인가요? 바로 구약 성경의 홍해를 연상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삼킬 것처럼 막아서던 홍해가 하나님이 통치로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함께 세상을 지나간 자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찬양을 부를까요? 인생을 살다 길이 가로막혀서 죽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이 길을 여신 것을 경험한 자들, 인생의 바다가 너무 출렁여서 고통하다가 예수를 불렀다가 구원받은 자들, 그런 자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이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하나님만 의로우십니다’라고 노래 부르는 자리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삶은 예배를 배우는 삶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모든 것은 죄의 결과이구나. 그 참혹한 결과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해결할 수 있구나’를 배우고 ‘하나님, 이 혼란 가운데 질서를 세워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만 믿고 의존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 예배를 연습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한 예배를 함께 드리는 자리에 서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