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구원은 신비한 일입니다. 누군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같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일하시는 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고넬료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시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시나요?
1. 복음을 전할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vv.1-8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시나요? 첫 번째로 복음을 전할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 군대의 군인입니다. 백부장은 6천 명 단위로 이루어진 로마 군단의 전투 보병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입니다. 지금 군대로 치면 영관급 장교가 아니라 병사들과 함께 전투에 나가 그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며 싸우는 상사입니다. 아마도 이 고넬료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주둔하는 군대에 부임해 왔다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보고 그때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 2절 상반절은 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2a]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당시에 유대인이 아니었다가 유대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은 두 부류로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인 채로 살면서 회당에 나와 말씀을 듣는 부류였는데 유대인들은 이들을 환영하긴 했지만, 그들이 자신들처럼 하나님을 진짜 잘 믿는다고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무리로 받아들여지고, 회당에서도 단순한 청중이 아니라 함께 예배 참여에 초대를 받으려면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고넬료는 할례는 받지 않아서 유대인들과 교제는 할 수 없었지만 누구 못지않게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신실한 태도는 2절 하반절에 나타납니다.
[2b] …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내적 신앙이 외적 행위로 나타난 것을 보면 고넬료가 얼마나 신실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면서, 기도도 하지 않고 이웃을 섬기지도 않는다면 그 신앙은 진짜 온전히 성숙한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미 하나님을 잘 섬기던 고넬료에게 무엇이 더 필요할까 싶기도 합니다만 그에게는 복음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가 알고 믿고 있었던 것은 구약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3절에 특별히 천사를 통해 개입하십니다.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구시라고 특별히 시간을 표현한 것은 이때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후 3시쯤에 하나님의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자 고넬료가 4절에 답합니다.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의 행위도 아셨고 그의 신실함과 경외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나요? 5절 말씀입니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시몬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를 것이 아니라 기왕 나타난 천사가 복음을 직접 전하면 안 되나요? 사람이 아니라 신비한 천사가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강력하게 예수를 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해답은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 있습니다.
벧전 1:12 …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복음’이 성령을 힘입어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인데 이 복음을 천사들도 살펴보고 깨닫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합니다. 쉬운 성경으로 보시면
[쉬운성경] 벧전 1:12 이제 여러분은 그들의 수고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의 말씀은 천사들까지도 알기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과 그렇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는 천사들은 복음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이길래 천사들이 알려고 하는데도 알지 못하나요?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인간이나 천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한 지혜로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과 34절에서
롬 11:33-34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
천사가 아무리 탁월하고 영광스러워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왜 성령 하나님은 천사들이 구원의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 알도록 도우시지 않나요? 성령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인간 안에 거하시며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성령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영’이라는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근데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과 함께하던 성령 하나님이 인간으로부터 떠나셨고 그 텅 빈 상태에 죄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죄’는 영적인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우리 영혼이 비어버린, 생명이 고갈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죄가 가져온 가장 치명적인 영향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그 영적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뜻을 가지고 계신 성령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진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 안에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담아놓으셨는데,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복음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기에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해 이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갖게 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복음과 반대로 움직입니다. 죄성의 가장 본질은 내가 선악을 판단하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 죄성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인간을 구원해 나가십니다. 여기에서 결국 복음과 종교가 갈라지게 됩니다.
인간이 원하고 바라는 길과 복음은 반대의 방향을 향하기에 사람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종교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일반 성도들은 종교적인 설교에 훨씬 더 끌리고 자극을 받게 됩니다. 한 예가 복과 저주입니다.
종교는 복을 받기 위해선 무엇을 열심히 행하라고 합니다. 반대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복과 저주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개념입니다. 한계가 있는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그 한계를 뛰어넘는 복이 없다면 인간은 불행할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로또를 사는 것도 지금 내 한계를 벗어나게 해 줄 복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추구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에 바로 이 복에 대한 열망을 이용해 종교는 더 노력하고 헌신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복의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혜로 모든 복이 다 주어졌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하고 애쓰는 것과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복이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대도 저주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 저주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습니다.
이렇듯 종교와 복음은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더 노력하고 더 충성하라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요구하는 종교가 인간 마음에 쉽게 와 닿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복을 거저 받기보다 내가 가진 것으로 거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가요? 우리에게 끊임없이 낮아지라고 합니다. 예수만 믿으라고 합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포기하라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복을 원한 이유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는데 복음은 그 욕심이 너를 채우지 못하며 하나님의 생명만이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다고 얘기하니까 욕심을 내려놓기가 싫은 것입니다.
노력이라는 과정뿐만 아니라 결과에 대해서도 종교와 복음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종교는 복을 받으면 높아지고 성공한다고 믿기에 눈에 보이는 보상을 자꾸 약속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보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참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부자이건 가난하건 높아지건 낮아지건 상관없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각자에게 주신 길에 따라 참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게 되면 그 복이 무엇보다 가장 큰 복이며 어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실 그래서 복음이 훨씬 어려운 길입니다. 우리의 근원에서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쉬운 길을 택하고자 종교인의 삶을 택하면 어떻게 되나요?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훨씬 더 큰 고통을 가져옵니다. 이 땅에서 내가 높아지고 성공해야 되니까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게 됩니다. 키 크고, 성적이 좋고, 돈이 많은 등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 앞에 서면 초라해 지고, 나보다 못한 사람은 무시하는 비교와 시기 질투 불만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행위로 복을 받고 싶은 마음 이면에는 그 행위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벌을 받을까 봐 무서워하는 두려움이 근원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매주 대표 기도하실 때 ‘이번 주에도 못 살았다’고 고백하시는데 못 살아도 괜찮습니다. 못 사셨으니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너무 잘 살았으면 예수님이 필요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잘 못 살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복음으로 자유를 얻어야 되는데 자기 기준으로 자기를 판단하게 되면 나는 늘 부끄러운 존재며 늘 하나님 앞에 서는 게 두려워집니다.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종교적 열심의 가장 큰 문제는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과 헌금에 대한 대가로 보상을 주시나요? 옛날 분들 중에는 십일조를 한 번 빼먹었더니 집에 수도관 터져서 그만큼의 돈이 나갔다거나 금식을 어기고 음식을 먹었더니 배탈이 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대로 상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종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의 서원도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계명처럼 이해합니다. 서원은 우리가 잘 지켜서 복을 받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저도 인생에서 많은 서원을 했지만 수없이 깨트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내가 요구하지 않았고 네가 원해서 서원한 약속마저 지킬 수 없는 자이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종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약속을 지켜 복을 얻고 약속을 어겨 무서워하는 등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바른 복음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그 복음 전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성령 충만하셔야 될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 뜻을 잘 알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벌주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살리신 은혜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종교인의 삶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신을 옭아매고 불안하고 만족이 없는 쳇바퀴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참 자유를 경험하고 계신가요? 여러분이 복음의 자유를 누리고 계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분명히 그 복음의 영향력을 확산하시며, 베드로처럼 천사도 알고 싶어 하는 복음의 은혜의 통로가 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시나요?
2. 복음을 전할 마음을 준비하십니다. vv.9-23
두 번째로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시나요? 복음을 전할 마음을 준비하십니다.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9] …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
육 시는 정오입니다. 점심이 되어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고 베드로는 배가 고픈 욕구를 느끼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 보시면
[10b] …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이어 13절과 14절을 보시면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유대인들은 음식과 관련된 규례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구약 성경에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될 것의 리스트는 하나님이 정결한 것과 정결하지 않은 것의 구별을 보여주시는 그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열심히 지켰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금지된 짐승들을 먹으라고 하시자,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어도 자신의 규례와 어긋나자 베드로는 거부했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시면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선험적인 틀을 깨뜨리고자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틀이 무엇인가요? 구원받을 자, 구원받지 못할 자를 정해 놓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뒤에 이방인들이 등장합니다. 19절과 20절입니다.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만약 하나님이 베드로의 틀을 깨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절대 교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유명한 랍비가 이방인에 대해,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려고 만드셨다고 얘기했고, 또 다른 랍비는 이방인 여자가 출산할 때 절대 도와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불필요한 이방인이 더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말한 기록이 실제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은 인간이 아니며 사람처럼 말할 수 짐승이라고 여겼습니다. 어려서부터 형성되어 뿌리 내린 틀이 바뀌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땅 끝까지’ 가라는 명령도 베드로와 제자들은 ‘땅 끝에 사는 유대인’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틀의 변화’가 없으면 우리도 선험적인 왜곡된 틀에 사로잡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우리와 이방인을 구별하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의 전형적인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을 가능성 있는 존재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것은 종교의 특성입니다. 하루 7시간의 기도라는 책도 있었듯이 목표를 높게 책정하고 그 과정을 수련으로 생각하는 태도로는 나 자신도 비참해지고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은 게으르고 모자란 사람으로 보게 되는 심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잘못된 틀 때문입니다.
복음은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불가능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노력해서 공부도 할 수 있고, 살도 빼고, 운동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구원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지는 선험적 틀 가운데 또 잘못된 틀은 구원을 내적인 본질의 변화가 아닌 외적인 종교성으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30년 동안 새벽 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고 구원받나요? 그래놓고도 구원 안 받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외적 행위가 아닙니다. 내면이 바뀌면 당연히 외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고넬료도 내면이 경건했더니 기도하고 구제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 행위를 해서 그의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구원을 착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구원관입니다. 예수 믿어도 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착함은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뜻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면 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여러분의 생각의 틀이 변화해야 합니다.
구원은 외적 형식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구원자요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변화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는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술 담배 끊지도 못하고 남 비난하고 못된 인간으로 살고 있네요’ 라고 고백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사람의 인생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닙니다. 본질이 변하면 외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의존이 착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구원은 본질 안에서의 변화입니다.
베드로처럼 틀로 사람을 재단하고,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내가 나은 존재가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는 과정일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앞에서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명의 주로 믿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온전한 복음의 영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