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바울 사도는 세 번에 걸친 선교 여행을 했습니다. 지난주 본문의 구브로 섬에서 시작해 소아시아로 배를 타고 넘어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릅니다. 그들이 원래 출발했던 안디옥과는 다른 곳인 이 곳에도 유대인들과 회당이 있었기 때문에 그 회당을 찾아갑니다. 14절입니다.
[14] 그들은 …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유대인들은 12명만 모이면 회당을 만들 수 있었기에 유대인들이 흩어진 곳마다 회당이 생겼고, 이 곳에서 말씀을 듣고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회당에 방문한 바울에게 그들이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냐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15절과 16절 말씀입니다.
[15]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회당장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타지에서 온 방문자들이 유대교에 정통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을 초청해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때까지는 바울이 유대인에게 유대교와는 다른 기독교를 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바울을 구약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기회를 이용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심을 그들에게 설교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신가요?
1. 구약의 약속대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vv.17-23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신가요? 첫 번째로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대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설교할 때는 그들에게 익숙한 본문으로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출애굽 사건부터 이야기를 하죠. 17절부터 19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고대에 일어난 이 역사적 사건이 얼마나 신비한지 지금도 영화와 만화로 만들어질 정도입니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이 놀라운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노예로 삼아 고통하게 했던 애굽은 지금의 세상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백성을 괴롭히고 아이들을 죽이고 학대했던 바로는 세상의 영향력을 미치는 권세자인 마귀를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귀의 노예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나요?
강퍅하게 백성들을 붙잡던 마귀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임할 때 그들을 놓아주었습니다. 이 재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백성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유로울 수 없지만 예수의 피로 속죄를 얻어 재앙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자유를 얻은 뒤 또 홍해를 만납니다. 홍해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또한 마귀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홍해를 지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홍해 사건을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는 심판의 물에 들어가 죽고 새로운 사람이 살아난다는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로 들어가는 모습은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 보면 그들이 물에서 살아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과 삶을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성령으로 새 사람이 태어난다는 의식인 세례, 즉 홍해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모형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식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인생이 확 달라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백도 하고 믿음도 발휘하고 결심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간 40년의 광야 생활이 펼쳐집니다. 애굽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비유했다면 광야는 결핍으로 고통하고 눈물 흘리며 어렵게 살아가는 인생을 비유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로 먹이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와 목을 축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 백성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고 생수가 되시는 예수의 생명을 마셔 이 땅을 살아감을 광야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왜 광야가 힘든가요? 광야를 통해 옛 사람이 죽임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광야에서 옛 세대는 사라지고 새로 태어난 세대가 광야를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즉 처음에는 새 사람과 옛 사람이 공존하며 동행하지만, 광야의 40년이 끝날 때 첫 세대가 다 죽은 것처럼 세상의 결핍으로 고통하던 옛사람은 결국 죽임을 당해야 함을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광야 후에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 백성들의 마지막 종착지인 하늘나라를 비유합니다. 즉 바울은 출애굽, 홍해, 광야, 가나안은 모두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림이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모두 한 면으로는 구원이 필요한 죄인의 모습과 동시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옷니엘은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유다 지파에서 구원자가 나타나실 것임을 모형합니다.
에훗은 구원자로서의 능력이 없을 것 같은 오른손 불구의 장애를 가지고도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기준에서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도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는 약속의 그림입니다.
드보라는 이름 자체가 꿀벌이라는 뜻이며 드보라와 함께 시스라의 머리를 뚫어 함께 구원자의 역할을 한 여인인 야엘의 이름의 뜻은 암염소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약속하신 젖과 꿀을 기억하시나요? 여자처럼 연약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예수님은 젖과 꿀을 공급하여 하나님 백성을 풍요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기드온은 너무나 두려움이 많아 구원을 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이 충만하게 되자 300명이라는 소수의 인원으로 미디안의 수십만을 물리침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연약한 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림을 모형합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고 형제들에게 미움 받아 쫓겨난 자입니다. 마치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창녀와 같은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셔서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나 죽임을 당하심으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을 모형합니다.
마지막으로 삼손은 어떻게 예수님을 모형하나요?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처럼 살았지만 결국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듯, 예수님 또한 나실인으로 오셨지만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시다 죄인을 구원하실 것임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이 모든 내용이 예수의 이야기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울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21절과 22절 상반절입니다.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a] 폐하시고 …
광야도 40년, 사울의 통치도 40년, 다윗의 통치도 40년입니다. 이 숫자는 인생이라는 기간을 상징하도록 일부러 맞춘 것입니다. 사울은 40년이나 통치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블레셋에 계속 침공 당하는 비참한 통치였습니다.
사울의 왕권을 통해 인간 왕에게는 구원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키가 크고 용맹하고 성실해 보여서 왕으로 세웠지만 욕망과 두려움으로 인해 결국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고통하게 만드는 악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울을 통해 인간 구원자는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그 후에 다윗을 세워 예수와 가장 근접한 모형을 보여주십니다. 22절 하반절입니다.
[22b] …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사울에게서 보셨듯 인간 안에는 죄로 인한 욕망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절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함으로 욕망과 두려움에 지배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지배받도록 하나님이 그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구원의 역할을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 보여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 또한 구원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도 고난을 벗어나 평온한 상황이 되자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이는 죄를 저지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인간은 온전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성경이 일부러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 다윗이 구원자의 모형에 적합했기에 성경은 다윗의 후손에서 다윗과 같은 구원자가 임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결론이 23절에 있습니다.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구약이 기록된 목적 자체가 구원자 예수에 대한 예언이며 그분을 믿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위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이 부분적으로 모형하던 것을 완벽하게 가지셨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예수님만을 유일하고 온전한 구원자로 믿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구원자들을 추구하며 돈, 힘, 지위, 능력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마귀의 영향력에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이 약속대로 오신 예수만을 구원자로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고 예수만을 믿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신가요?
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vv.24-31
두 번째로 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이신가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4절과 25절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구약을 이야기하다 왜 세례 요한을 이야기한 것일까요?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과 20절입니다.
요 1:19-20 [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 [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세례 요한이 예수를 추천했으니 메시아가 맞다고 세례 요한을 통해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어떤 반응을 했나요? 27절과 28절입니다.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 예수를 정죄하여 …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인간들이 기대하던 구원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구원과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모두 구원을 열망했지만 그것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구원, 배부르고 평안하고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다고 삶의 환경이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주시고자 하는 것은 아무리 환경이 좋아져도 영혼의 욕망과 두려움이 우리를 끌고 가는 무서운 죄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한 자로 오셔서 로마로부터 구원하고 모두 부자 되게 해 주시지 않자, 그런 구원을 기대했던 자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29절 상반절을 보시면
[29a]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
만약 모든 사람들이 마음이 열려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다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대가’인데 죄 없는 예수님이 대가를 치르셔서 우리가 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 이후에 하나님이 또 어떻게 하셨나요? 29절 하반절을 보시면
[29b] …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하나님이 죽음에서 살려심으로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보여줍니다. 31절입니다.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 무덤에 들어가신 것, 무덤에서 살아나셔서 그들을 만나시고 심지어는 함께 식사도 하시고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설교하는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지난 후라 많은 증인들이 살아 있습니다. 진짜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성경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임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에도 자꾸 외부적 영향력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느 신학교에서는 예수만이 구원자가 아니라 착한 사람들도 구원받고 구원을 받을 다양한 길이 있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 길만 주셨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예수를 보내겠다고 한 가지 길만 약속하셨고,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려내심으로 예수님만이 내가 보낸 참 구원자가 맞다고 증명하셨고,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만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물론 우리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에서는 예수 말고 다른 구원자들을 기대합니다. 심지어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말고 심적으로 구원자로 기대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부모입니다. 물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온전하지 않습니다. 통제와 욕심과 두려움이 교묘하게 섞인 불순물입니다.
여러분이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인생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온전한 구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경험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또한 결혼에서 구원자를 기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은 배우자를 찾는 것에 아주 노골적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결혼 중개업소에 원하는 배우자 상에 성격, 가정 배경 등의 요소도 있었다는데 요즘은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첫 번째 연봉 두 번째 부모님 노후 준비 세 번째 아파트 모든 조건이 다 돈입니다.
물질 만능 시대에 돈을 가진 배우자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구원자라고 여기는데 그 결혼이 행복할까요? 예수 믿는 사람은 여기에다 신앙까지 갖길 원하니 더욱 까다로워집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은 구원자가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인간이 구원자가 아님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기독교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목사님들과 직접 교제하고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목사로서 옥한음, 오정현, 조현삼, 이찬수 목사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안다는 것은 마치 축구 선수가 손흥민을 직접 아는 것같은 수준입니다.
이 분들을 만나게 하셨을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사랑의 교회를 갔을 때는 옥 목사님이 제가 교역자인 줄 모르셨다가 결혼식 주례를 해 주신 이후로는 저를 알아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안면을 튼 정도이지 안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제가 수요 예배 설교를 한 어느 주에 옥 목사님이 비서를 통해 부르셔서는 설교 잘 한다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 때 마치 천사의 음성을 듣는 것같이 기쁘고 인생이 빛이 드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개인적인 친분은 깊지 않은 사이로 사임 인사를 드린 후 유학을 갔는데 당시 사랑의 교회에 계셨던 목사님이 뉴욕의 교회로 부임하시면서 옥 목사님을 부흥 강사로 모셨습니다.
저도 가도 되냐고 연락을 드렸더니 마침 잘 되었다며 목사님 운전하고 식사하고 수행하라는 명을 받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평소 한 시간 운전도 힘든 제가 일곱 시간을 운전하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목사님과 함께 식사하고 궁금한 것을 여쭙는 꿈과 같은 2박 3일을 지냈습니다.
헤어질 때 목사님께서 ‘나에게 담임 목사 추천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데 한국에 오면 꼭 찾아오게’라고 말씀하시자 백지 수표를 받은 것 같은 감동이었습니다. 감동이 너무 심했는지 과속하다 걸려서 이백 불 벌금을 물었지만 전혀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종종 옥 목사님을 생각하며 지내다, 논문이 거의 통과가 됐고 귀국만 남겨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옥 목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고 눈이 짓무르도록 울었습니다. 너무 서운하고 슬퍼서 옥 목사님 사진으로 액자를 만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두며 하나님께 목사님을 왜 데려가셨냐고 울부짖었습니다.
몇 날 몇 일을 울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그리워서 울었던 것이 아닙니다. 옥 목사님이 내 미래의 구원자가 되기를 열망했는데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이 애통해서 울었던 것입니다. 옥 목사님은 돌아가셔서 그렇지만 나머지 모든 목사님들도 이런 과정을 통해 한 분 한 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특별한 만남을 허락하신 이유가 그분들을 통해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람을 의지하고 그가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붙잡았던 허상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다 의미가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 인생에는 어떤 구원자들이 있으신가요? 아니 있으셨나요? 이것을 복음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아마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왜 상처 입나요? 그를 통해 유익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사람이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남게 하시기 위해 성도의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 배신당했을 때, 사람에게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고통할 때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여러분의 구원자로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