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제가 대학생 때 노방 전도를 나간 적이 있습니다. 사영리를 전하는 훈련을 받고 나갔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하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들은 불쾌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았는데 그 중 한 학생이 호기심 있게 바라보길래 사영리를 전했습니다.
한 장 한 장 진지한 태도로 듣다가 마지막 장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예수님이 왕이 되셔야 한다는 그림을 설명하며 영접 기도를 하는 순서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의 중심을 드리겠냐고 질문했는데 학생이 그러겠다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한 줄 알고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며 다시 물었는데 역시 그렇다고 해서 영접 기도를 했습니다. 학생들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이 학생의 반응에 너무나 감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뒤 소식은 알 수 없지만 마음을 열었던 학생이니 언젠가는 교회를 다녔으리라고 짐작해 봅니다. 복음에 쉽게 반응하거나 거절하고 적대적인 상반된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어떤 상반된 반응을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복음에 대해 어떤 상반된 반응이 존재하나요?
1. 수용과 믿음의 반응입니다. vv.42-44, 47-49, 52
첫 번째 복음에 대해 수용과 믿음의 반응을 합니다. 42절 말씀입니다.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지난 두 주에 걸쳐 살펴본 대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들어가 구약 전체가 보여주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임이 확정되었고 그렇기에 예수를 믿어야만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번 더 와 달라고 청한 유대인 뿐 아니라 이 복음에 반응한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43절 상반절입니다.
[43a]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
한 번의 설교에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초대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약속하는 것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이 땅의 갈등, 고통, 슬픔은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 없이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아 소식에 사람들이 쉽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위하여 특별히 사도들에게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허락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함께하시자 사람들은 쉽게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향해 43절 하반절에 두 사도가 권고합니다.
[43b] …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설교 한 번에 모든 청중이 은혜를 받고 예수 믿게 되는 장면은 아마도 모든 목사들이 꿈꾸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어려운 환경 가운데 기적처럼 있었던 일입니다. 그 다음 주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44절입니다.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성경의 ‘전부’ 혹은 ‘거의’ 등의 표현은 ‘와야 할 사람들은 전부’라는 뜻입니다. ‘온 시민’이라고 해서 당시 비시디아 안디옥에 살던 수만 명이 다 온 것이 아니라 회당에 올 만한 사람들이 다 왔다는 것입니다. 아마 전 주에는 몇 십에 불과하던 수가 몇 백으로 늘어났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나요? 전 주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주변에 알리고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올 사람들이 다 모여 회당이 차고 넘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무엇을 깨닫나요? 구약이 약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47절 말씀입니다.
[47]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구약의 이사야 49장 6절로 ‘너’는 메시아입니다. 이방의 빛이신 예수님을 통해 땅 끝까지 구원이 임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바울은 이를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예수를 전하는 자신들도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제까지는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예수에 대해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48절입니다.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 구절은 ‘제한적 속죄’라는 신학의 바탕이 되는 구절입니다. 제한적 속죄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속죄의 은혜가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으신 사람들에게만 영향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반대말은 ‘보편적 속죄’로 이는 예수님의 속죄의 능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는데 그 중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만 구원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능력에 대한 두 입장은 역사상 많은 논쟁이 있었다가 칼빈의 5대 강령 이후 종교 회의를 거쳐서 보편적 속죄론이 이단이라고 판별이 났습니다. 보편 속죄론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셔서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리고 구원받고 싶다고 믿음을 발휘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원하는데 다 구원하시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관점에서 어긋납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신 사람은 다 구원받는 것, 이것이 바른 신학입니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작정해 놓으시고 준비하셨다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구원을 받고 난 후에야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 작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결단한 순간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부터 우리를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때 반응할 수 있었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하나님께 먼저 반응할 수 없는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반응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후 어떻게 되었나요? 49절입니다.
[49]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통해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될 놀라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임하자 그 은혜에 참여한 자들은 어떤 감동을 경험하나요? 52절 말씀입니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성령이 충만하여 큰 기쁨을 가져왔습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곳에는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한국의 1960년부터 80년대까지의 30년의 기간처럼 급속한 성장을 이룬 곳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45년 한국이 해방되었을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가 약 2,500만 정도였고 그때 기독교 신자는 35만 정도로 1%가 조금 넘는 수치였습니다.
1960년도에 전체 인구의 약 2.5%로 남한에만 약 50만 명 정도로 추정이 됩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400% 성장해서 200만 명이 되고, 그 다음 8년 동안 2배가 되어 400만이 되고, 88 올림픽 즈음에 약 800만 명을 돌파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 결과 1990년도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10개 교회 중 한국 교회 5개, 전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 교회 23개가 포함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가 한국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여기에 그 역사의 현장을 경험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부흥이 가장 현저했던 사건으로는 1973년에 있었던 빌리 그레함의 전도 집회였을 것입니다.
5일간 집회에 참여한 사람만 약 300만, 마지막 날에는 110만 정도가 모였다고 하고, 5일 간 예수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7만 2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00만 명이 모여 집회하고 뜨겁게 울부짖던 시대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이 부흥을 다시 달라고 기도해도 한국에 이런 부흥은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복음을 전파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에 특별한 능력과 은혜를 부으셔서 설교 한 번으로도 사람들이 구원받는 은혜를 주시지만 이후에는 하나님이 부흥의 물결을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시며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십니다. 그 후에는 왜 처음과 같은 부흥의 물결이 임하지 않나요?
어느 집에나 아기가 태어나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양육입니다. 아이를 10명 낳고 양육은 하지 않고 알아서 크라고 하는 것은 방임이자 직무유기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800만, 900만, 천만을 이야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제대로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 제대로 성장하지 않으며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지금은 바울의 설교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할 시기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설교 전에 영화를 짧게 보고 영화 안에 나온 기독교 세계관을 논하는 문화 교회도 있습니다. 운동하는 교회가 되고자 이름을 아예 레크리에이션 교회라고 짓고 교인들이 일주일 내내 수영하고 배드민턴하고 농구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욕구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그리스도 한 분에게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예수에게 집중하며 예수만 바라보고 믿음의 중심에 예수만 온전히 붙들 때 교회가 생명을 유지하고 성도 또한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 바울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진짜 설교는 훨씬 길었겠지만 성경은 그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만을 이야기하나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을 계속 인용하며 너희들이 알고 있는 구약 전체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했더니 수천 명이 한 번에 구원을 받고 복음의 역사가 초대교회에게 강력하게 나타났습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하며 너무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하다 예수 외의 것을 많이 제공했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여 예수로부터 오는 생명과 은혜를 누리게 될 때,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건강한 성도들을 세우시는 은혜를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복음에 대해 어떤 상반된 반응이 존재하나요?
2. 비방과 거부의 반응입니다. vv.45-46, 50-51
두 번째로 복음에 대해 어떤 상반된 반응이 존재하나요? 비방과 거부의 반응입니다. 교회가 확장되고 복음이 전파되면 마귀가 반드시 훼방합니다. 마귀가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45절처럼
[45]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처음에는 듣고 좋은 것 같아서 다음 주도 초대했는데 수백 명이 모여들자 유대인들이 시기가 났습니다. 시기심은 인간 안에 가장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영향력입니다. 죄악은 인간을 하나님처럼 되게 하고자 하기에 남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을 만들어냅니다.
세상은 이것을 바탕으로 굴러갑니다. 물론 세상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동인도 경쟁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경쟁과 노력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갖지 못하거나 이루지 못한 것들을 이룬 사람들을 향한 질투와 시기로 이어지는 순간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 안에 시기와 질투가 있다면 우리가 죄에 얼마나 매인 존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이런 죄악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 남도 공격하고 교회를 훼방합니다. 구약에서 사울이 시기심에 사로잡혀 수 십 년간 다윗을 죽이고자 쫓아다닙니다. 세상에서도 겉으로 온순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시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면 나보다 잘난 인간을 밟아 죽여서라도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죄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려고 하면 마귀가 사람들의 무서운 죄성을 통해 방해하고 짓밟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나요? 드라마처럼 평생 힘을 비축해서 가해자들을 한 명 한 명 보복해야 하나요? 46절입니다.
[46]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바울과 바나바는 새로운 길을 깨닫습니다. ‘동족을 먼저 구원받게 하기 위해 열심을 냈는데, 이렇게 방해가 많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늘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이방인들에게 가야 하나 보다’라고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발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이 사도행전에서 중요한 변곡점입니다. 이제까지는 유대인 회당에 가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다 우연히 동석한 이방인에게 전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곳에서 유대인들의 강퍅함으로 기독교 역사의 큰 물줄기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50절입니다.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선동에는 항상 거짓말이 들어갑니다. 이 배후에는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마귀의 강력한 영향력이 있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51절 말씀입니다.
[51]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왜 티끌을 떨어버렸나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4절을 보시면
마 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먼지는 그 집에 속한 일부이므로 먼지를 떨어버린다는 것은 그 곳의 먼지 조각 하나도 나와 관련이 없다는 선포입니다.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자 왔는데 이 좋은 것을 거부하다니 이 후에 하나님의 복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먼지 떠는 행위로 보여준 것입니다.
한국에도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시기와 복음을 거부하는 시기가 크게 나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이전에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다면 지금은 전반적인 적대감이 너무나 만연해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한국교회가 성장 추세에서 감소로 꺾인 결정적 사건을 1992년에 있었던 다미 선교회 사건으로 꼽고 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 오신다고 TV에서까지 방영하며 전 국민이 자정 넘게 기다린 날이 있었습니다. 마포에 있던 다미선교회 사람들은 그나마 양복을 입었는데 여러 분파 중에 한 곳은 이삼백 명이 흰 옷을 입고 산 속에서 몇 시간씩 박수치고 흥분하다가 결국 12시가 지나자 황당해 하면서 도망가는 모습을 방송으로 본 뒤로 기독교인에 대한 인식이 비이성적이고 광신자 같다고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기독교 인구는 계속 감소해서 지금은 주일에 출석하는 인원이 약 500만 명 정도로 예측이 됩니다.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800만이 조금 넘지만 3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또한 500만 중에서도 이단이 50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따지면 한국 인구 5천만 중 주일 이 시간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10%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요? 물론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들며 어쩌면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병 낫고 부자 되려고 왔었는지 모릅니다. 제일 큰 문제는 역시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복음의 본질이 너무나 흐려졌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영향력은 기복주의와 율법주의입니다. 기복주의는 꼭 복만을 원한다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문제 해결자로만 바라보는 시각도 포함됩니다. 율법주의도 꼭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로 하나님에게 더 큰 사랑과 인정을 받기를 열망하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과 너무 잘 맞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죄만 해결하시고 영생만 주시는 분이라고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가 당장 사탕 안 줄 때 엄마를 미워하는 것처럼, 믿음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수준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유익을 통해 예수를 믿기 시작합니다.
그 수준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그것만 강화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본질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은혜보다 그 외의 것들을 강조하고 기대하면서 예수가 빠진 복음을 믿게 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문제를 가져왔고, 이런 부가적인 것들을 열망하던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 채워지지 못하자 상처 받고 떠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생긴 또 다른 부가적인 문제는 목회자가 너무나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60년대에 목사가 된다고하면 모든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가난하고 멸시받는 비참한 인생이 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들은 소명에 충실한 분들이었고 예수를 위해 인생을 바칠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많이 생기자 청년부에서 조금만 신앙이 좋고 열심히 있으면 신학교를 가라고 권하곤 했습니다. 제가 총신대를 다녔을 때가 피크였는데 한 학년에 천 명씩 다녔고, 비인가 신학교가 400개에 육박했으며, 일 년에 만 명씩 목회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질적 하락을 가져 왔고 또한 이단들이 창궐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 역사 중 이렇게 집요하게 다양하게 스스로 예수라고 주장하는 이단을 가진 나라는 한국 밖에 없습니다. 한국에서 자기가 부활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만 127명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이단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단이 나타난 배경 역시 율법주의와 기복주의입니다.
율법주의에 쉽게 파고드는 이단이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율법주의는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안식교는 구약의 음식 규례를 지금도 지켜야 된다고 얘기합니다. 피 있는 거 먹지 않고 유기농만 먹고, 그래서 음식 장사도 하고 채식주의 뷔페도 합니다. 그런데 규례를 지키는 핵심은 예수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옷을 깔끔하게 입고 봉사 시간을 지키고 까다로운 규례들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기복주의에 기반을 둔 이단들도 많습니다. 신천지는 자신들이 나중에 전 세계를 14만 4천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통치할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으로 젊은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난하고 능력이 없지만 예수가 오셔서 신천지만 이루어지면 왕이 되고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뿐 아니라 목회자들 중에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너무나 힘과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늘 경호원을 대동하시던 조용기 목사님입니다. 제가 순복음 기도원에서 몇 개월씩 여러 번 숙식을 했는데 가끔 목사님이 오시면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난듯 열광을 했습니다. 당시 그 기도원에는 의자가 중간 이후부터 있고 앞부분 절반은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어서 아픈 분들이 누워 계셨습니다. 하루는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하셨는데 제일 앞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병 걸린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 후에 나가시다 그 아이를 보시고는 긍휼한 마음이 드셨는지 손을 내밀어 기도해 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 있던 병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매달리자 경호원들이 그들을 다 밀쳐내며 목사님을 보호해서 퇴장해 버렸습니다. 목사님 손 닿는다고 다 낫는 것도 아닐텐데 그 교회에서는 목사님을 병 고치는 천사처럼 바라본 것입니다.
이런 자리를 이단 교주들이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교주들이 엄청 많이 생겼던 것입니다. 모든 이단이 잉태된 배경이 사실은 한국교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음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생명이 되시며 능력이 되십니다. 한 사람을 추정하고 높일 필요 없습니다. 사람은 바울처럼 맡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성령 충만해도 하나님이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제는 적은 수가 모이더라도 예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세워져 예수의 생명이 있는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이 시대의 목적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명의 구주로 바라보고 계신가요? 예수 말고 다른 것을 의존하는 죄성으로부터 벗어나 매일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그 예수의 생명과 은혜로 여러분을 살리시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까지 퍼져나가는 은혜를 맛보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로 인한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삶과 말로 드러내는 하늘 사랑교회 성도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