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사람은 누구나 기적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처했을 때 기적으로 단번에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또 인생에서 반드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 마음을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이야기하고 성경에 많은 기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적의 목적은 개인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적(miracle)보다는 표적(sig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싸인’이 무엇인가요? 실체를 보여주는 지시표입니다. 우리 건물 로비에는 ‘3층 하늘사랑교회’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표시가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3층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싸인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신비한 기적들도 싸인입니다. 그 기적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알려주는 사건들입니다. 이런 성경의 목적을 오해하게 되면 기적이 혹시 일어나더라도 본문의 루스드라에서 처럼 부작용이 생기게 됩니다.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태어나면서부터 불구였던 앉은뱅이를 바울이 주목합니다. 9절입니다.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를 가진 이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다면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10절입니다.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만약 바울이 선포했는데 일어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저 사람에게도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도 능력을 주셔서 선포하는 대로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비슷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도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에게 ‘금과 은 내게 없으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더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고 그 날 5천 명이 새롭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앉은뱅이의 기적과는 반대로 기적의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기적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무엇인가요?
1. 우상 숭배적 경향성이 강화됩니다. vv.11-18
그렇다면 기적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우상숭배적 경향성이 강화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루스드라는 고대 그리스 땅으로, 이들은 기적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신이 계시는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래 알고 있던 그리스 신관이 자극된 것입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과 거의 유사한 신이었습니다. 싸우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보복하고, 또 특정한 일을 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기도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들은 루가오니아 방언 즉 동네에서만 쓰는 방언으로 소리를 질러서 사실 바울과 바나바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어떻게 생각했나요? 12절 말씀입니다.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서 제우스가 가장 센 신이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전령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던 신화 속 인물들과 대조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바라본 것입니다. 이 소문이 금세 퍼져서 13절에 보면 근처 제우스 신당에까지 알려졌습니다.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에게는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늘 제우스신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고 제우스신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말해왔는데 마침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장 소를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리고 꽃을 씌어주려고 합니다. 그제야 바울과 바나바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됩니다. 14절입니다.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방언일 때는 몰랐다가 상황을 알게 되자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15절에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우리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고, 너희들이 하는 일은 헛된 일이며,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결국 18절에서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고자 행했던 기적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가져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던 제우스에 대한 우상숭배적 마음에 이끌리어 반응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과거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신화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중 대표적으로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있습니다. 제우스가 사람들에게 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사람들이 음식도 먹지 못하자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갖다 주었습니다. 화가 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산꼭대기에 쇠사슬로 묶고 매일 독수리를 보내서 간을 쪼아 먹게 했습니다. 죽지도 않고 자는 동안 새 간이 생기면 아침에 독수리가 와서 쪼아 먹기를 반복하다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프로메테우스의 쇠사슬을 끊어 구원해 줍니다.
불에 대한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요즘 시대에 이것을 진짜라고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진짜라고 믿었습니다. 이들 중 강한 신들이 12명이었고 그래서 지역마다 제우스 신 비너스 신, 아폴로 신 등 12명의 다양한 신전들이 도처에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직업이나 원하는 능력을 가진 신을 섬기는 것이 너무 당연했고 실제 신들이 도움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의 기적이 그들 안에 있던 우상숭배적 경향성을 자극한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사람들의 우상숭배적 경향성이 자극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도 하나님은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치료가 불가능한 간경화로 임종을 준비하라는 선고를 받으셨는데, 저희 어머니의 권고로 기도를 받으러 다니시다가 어느 날 꿈을 꾸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담아 할아버지의 온몸을 씻겨주시는 꿈을 꾸시고는 병이 나으셔서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벌떼와 같이 몰려들었고 70년대에는 400%나 성도가 불어나는 부흥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떤 사람들은 이 우상숭배적 경향성이 변하지 않은 채로 마치 예수를 믿는 것처럼 교회를 다녔고, 주변에서 병이 나았거나 사업을 하다가 부자 된 분들을 보며 우상숭배적 경향성이 더 자극된 것입니다.
만약 바울과 바나바가 ‘맞아 내가 제우스야 나만 믿으면 너희 원하는 소원을 다 들어줄게’라고 했다면 아마 그 지역에서 큰 교회 짓고 영향력을 끼치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들을 섬길 마음이 있었고 기적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자기 안에 우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그때 하나님이 신비한 능력으로 나를 구원하시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마음이고, 또한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아나가는 과정인데,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신앙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사실 기적으로 단번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열망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그 기초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 교회에서도 그런 설교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 인생 가운데 기적의 부작용을 많이 경험하도록 하셨고, 제 안에 있는 열망을 통해 미숙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그것을 이용하는 악한 무리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세계 곳곳에 이런 경향성은 존재합니다. 어디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이들의 우상숭배적 경향성을 자극해서 노예로 만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악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유학을 하면서 크고 유명한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우상숭배적 경향성을 강화하는 교회도 있었고 세련되게 사람들을 속이며 모으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단기간에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는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크다고 해도 2, 3만 명이라 한국에 비하면 작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주목을 끌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설교가 아닌 프로젝트가 공지 됩니다. ‘골프와 함께하는 영적 여행’ 프로젝트라면 무대를 골프장으로 만들어서 모래를 채우고 잔디를 깔고 목사님은 골프채를 메고 나와서 골프를 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벙커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며 골프의 기술과 결합해 인생의 벙커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쇼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교회는 Potter’s house 교회입니다.
마침 그 교회에서 리더십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신학생들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한 번에 만 명이 들어가는 예배당, 넓은 주차장, 흑인들의 열기 있는 찬양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 강사가 비행기가 연착이 되어 못 올 뻔했으니 제트기를 살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하자 사람들이 아멘 아멘 외칠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저녁에는 이 교회의 담임인 T.D. Jakes 목사가 부흥회를 직접 인도했습니다. 설교를 거의 2시간 했는데 그 시간 중 가장 반복한 얘기가 당신들은 백만장자가 될 것입니다. 당신들은 집을 사게 될 겁니다. 당신들은 캐딜락을 몰게 될 겁니다. 사람들은 그때마다 열광하면 아멘 하고 강단으로 몰려나갑니다. 나중에 보니 마음에 드는 축복마다 시드머니로 돈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돈을 내며 흥분이 고조되던 중 목사님은 큰 소리로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What do you want? What do you want?”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손을 들며 “Money! Money! Money!”를 외치며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모두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15년 전 느꼈던 사람들의 흥분과 열기가 아직도 충격처럼 남아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요즘도 T.D. Jakes 목사를 검색하면 ‘미국에서 가장 설교 잘하는 설교자,’ ‘미국의 역대 25명의 복음주의자,’ ‘전직 대통령인 오바마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라고 나옵니다.
그 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일까요?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내가 원하는 돈을 하나님이 많이 주시기를 열망하며 시드머니를 심고 나도 부자가 되겠지, 성공하겠지 하며 우상숭배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되지 않는 엉터리 기독교의 영향력이 무분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도 비슷합니다. 이 정도까지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사람들의 우상숭배를 강화하며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모으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인가요?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근원인 죄가 해결되어 우리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욕망이 폭로되고 제거되어야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할 수 있고 이 땅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끝까지 의존하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온전한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기적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무엇인가요?
2. 핍박과 환난이 증가합니다. vv.19-28
두 번째로 기적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무엇인가요? 핍박과 환란이 증가합니다. 19절입니다.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같은 무리입니다. 앞에서는 신이라고 경배하며 제사 드리려고 하다가 유대인들이 와서 저들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자 갑자기 돌변하여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능한 일인가요? 사실 이들은 바울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지 않자 극도의 반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했나요? 16절입니다.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방임하셨던 것이고, 그들이 했던 일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15] …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일생을 바쳐 신을 섬긴 일이 헛되다니 열광했던 만큼 강렬하게 반대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내내 종교 지도자들이 핍박하고 방해했지만, 결정적으로 예수를 죽여야겠다고 결정한 건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후였습니다. 죽어 썩어서 냄새나던 나사로가 살아나자 예루살렘 사람들이 직접 가서 그것을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3절입니다.
요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부인할 수 없는 기적이 나타났더니 이때부터 예수님을 진짜 죽이겠다고 모의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나요?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사로를 살려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잘못 오해하면 죽은 사람을 기도해서 살리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죽을 자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살아납니다. 고대에 돌을 던져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조약돌이 아닙니다. 머리만한 돌로 찍어 내리는 것입니다. 바울도 아마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도시 바깥으로 그를 끌어 던진 것입니다. 생명이 있었으면 알았을 것이고 그러면 죽을 때까지 돌로 찍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20절 상반절을 보시면
[20a]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
살아납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으면 걷지도 못해야 되는데 더 놀라운 일을 합니다. 20절 하반절부터 21절을 보시면
[20b]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죽은 사람을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살리신 것입니다. 사명이 있으면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그런데 사명이 끝나고 이 땅에서의 생명이 다 하면 하나님이 부르실 때 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 땅보다 하나님 나라는 훨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잠식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바울은 22절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바울만 환란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기 위한 환란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어납니다. ‘환란’의 원어인 쓸립시스의 원뜻은 ‘탈곡’입니다. 벼에는 원래 볍씨가 같이 있고, 이 껍데기를 벗겨야 알곡이 나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껍데기가 다 벗겨져야 됩니다. 껍데기가 무엇인가요?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나의 욕망을 이루고 싶은 집착, 별것 아닌 것에 떠는 두려움, 하나님 뜻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근원적 강퍅함. 하나님은 환란을 통해 이런 껍데기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시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미리 벗겨진 사람은 알곡의 생명의 영향력이 더 많이 드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과일에도 귤처럼 껍질이 잘 벗겨지는 과일이 있고 파인애플처럼 껍질 까기 힘든 과일이 있듯 사람도 태생적으로 옛 사람이 너무 강력해서 잘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울퉁불퉁 부딪히는 사람마다 깨뜨리는 사람도 나름대로 사명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 껍데기를 벗기는 사명입니다. 둘 다 바나나면 껍질이 벗겨지지 않고 멍만 듭니다. 야곱이 라반을 만났듯 더 센 자가 상대를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은 모든 악과 미성숙함까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요셉의 인생이었습니다. 형제들 사이에 시기 질투는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외동이기를 상상해 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실제로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고 요셉이 울며 애원하는데도 자기들끼리 밥을 먹습니다. 그 장면이 본인들에게도 얼마나 강렬했는지 20년이 지난 다음에 그들은 ‘구덩이에 갇혀 울던 요셉을 무시해서 우리가 벌을 받나 보다’라고 후회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용서했나요? 하나님이 당신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죽어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시고자 하셨다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줍니다. 형제들의 악이 구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만약 형들이 요셉을 너무 사랑해서 잘난 척하고 까불어도 다 용납하고 귀여워해 주었다면 요셉이 애굽에 가지 못하고 흉년에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며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큰 사명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역사상 바울과 같은 큰 사명을 가진 사람이 또 있울까요? 바울이 없었으면 지금의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신약 성경에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썼고, 당시 알려진 모든 세계였던 로마 제국에 바울이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통해 복음 전파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이런 바울이 그래서 무엇을 경험했나요?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핍박과 환란을 경험합니다. 나 혼자 하나님 나라 가는데도 환란을 통해 껍데기가 벗겨져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격과 고통이 있었을까요? 바울은 이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처럼 기적을 경험하길 원하시나요? 그러면 여러분은 바울처럼 환란 또한 많이 경험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특성과 모양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감당할 만큼만의 시험을 주십니다.
바울은 선교 여행을 마치고 파송되었던 안디옥 교회로 돌아옵니다. 26절부터 28절입니다.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죽었다 살아나는 고통과 유대인들의 박해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행하신 일들을 보고하며 1차 선교 여행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때로는 기적을 통해 확장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만큼의 박해와 고난과 환란이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기적이 아니라 교회 내에 들어온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버리고 바른 복음의 말씀에 서는 시대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낀 세대처럼 경험했습니다. 제가 20대 때 기도원은 기도굴 잡기가 늘 경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원에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저도 기적과 능력이 많이 주어졌던 70년대에 사역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복음보다 원래의 기질대로 기적으로 단번에 변화를 보이고자 하는 사역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원에서 숙식하고, 매주 삼각산에서 기도하고, 병 낫는 집회들을 참석하면서 깨달은 것은, 기복주의가 만들어낸 병폐와 그로 인한 한국 교회의 우상숭배적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그곳에 머물지 않도록 오랫동안 복음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지 믿을 수 있게 하셨고, 기적으로 인생이 당장에 바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환란을 겪더라도 우리 안의 옛 사람이 죽임을 당해 하나님만 믿는 거룩한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기적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있으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기적인가요?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고 병이 낫지 않아도 우리가 예수의 사랑에 감동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 아닐까요?
내가 힘들기 때문에 내 옆 사람이 갑자기 변하길 원하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당장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셨다면, 이 시간 기적이 아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게 해달라고 하나님만 바라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