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1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브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사실 녹록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도와주시지 않는 것 같은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단순히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악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보이스피싱, 묻지마 폭행, 사기 등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들면 너무 두렵습니다. 그런데 왜 성도가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에 살게 된 것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가 힘들고 악한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도가 힘들고 악한 세상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순종을 시험받기 위해서입니다. vv.1-6
첫 번째로 순종을 시험받기 위해서입니다.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두 번이나 반복되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전쟁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사사기 초반까지만 해도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용맹한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다해 싸운 결과로 이스라엘이 지금 평화를 누리고 땅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전쟁을 하던 첫 세대는 믿음이 아니고는 살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주인이 다 있었습니다. 게다 가나안에는 이스라엘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거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무엇으로 싸웠나요? 믿음으로 싸웠습니다. 그 대표적 믿음의 사람인 갈렙의 고백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14장 10절부터 12절입니다.
수 14:10-12 [10] …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
지금 갈렙이 85세입니다. 젊어서부터 전쟁을 하며 수십 년간 싸웠는데도 아직도 점령하지 못한 산지를 두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점령할 수 있다고 하며 산지를 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싸움을 했더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나요? 여호수아 14장 14절입니다.
수 14: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갈렙은 상황과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편안했으면 하나님만 의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며 갈렙은 나이가 들 때까지 견고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매일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에서 믿음을 배운 전 세대가 다 죽고 다음 세대는 너무 평안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할 필요가 없고 믿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쩌면 세상의 전쟁이 꼭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저도 돌아보니 제 평생 가장 하나님을 의존했던 때는 가장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특히 20대 중반에 아버지 회사가 망하고 저 또한 쓰러져서 학교도 다닐 수 없게 되었을 때 고통이 컸던 만큼 영적으로 가장 예민했습니다. 영적으로 예민했더니 지금 생각해도 특별한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단순히 아픈 사람을 위해 혹은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 않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답답해서 기도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추석이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갑자기 기도하고 싶어서 혼자 방에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다 보니 얼마나 많은 집들이 이 추석에 차례를 지낼까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수천만 한국 사람들이 귀신의 힘을 빌어 잘 살아보겠다고 귀신에게 밥을 차려주는 어두운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 나라의 어두움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과 모여 있다가 갑자기 혼자 방에 들어가서 울고 있으니까 가족들도 제가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을 가슴 졸였을 것입니다. 가족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저 스스로도 이상했습니다. 왜 내가 남들이 차례지내는 것으로 이렇게 가슴 아프게 울고 기도하는지. 그러나 그때가 제 영혼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품었던 때였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가난함과 고통 속에 살았고, 그만큼 하나님을 의존하다 보니, 평소에는 관심이 없던 영역에서마저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상황이 평안해지고 전쟁이 끝나자 하나님에 대한 의존이 사라져 버렸기에 하나님이 일부러 주변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3절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왜 이렇게 자세한 목록이 기록되었나요? 세상의 영향력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다양하며 또한 가까이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에 찾아오는 시험 역시 구체적이고 다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까이에 많은 민족들을 남겨 놓으신 목적은 4절에 나옵니다.
[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전쟁을 치르지 않은 세대라 마음에 하나님과 함께할 은혜를 갈구하지 않으니까 이들이 세상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하나님이 아시고자 이들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결과가 무엇인가요? 5절과 6절입니다.
[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 구절은 앞으로 계속 구약 내내 반복됩니다. 명령을 지키나 안 지키나 보려고 하셨는데 결론은 늘 똑같습니다. 이들은 완전히 항상 언제나 실패하며 우상을 섬깁니다. 본문에서 이방인과의 결혼이 왜 문제인가요? 이 구절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결론입니다. 저희 어머니도 예수 안 믿는 저희 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제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삶의 모든 가치가 연합되는 과정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더 강하게 영향을 미치나요? 세상의 영향력입니다. 여기서 결혼은 세속화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는 방식들이 세상 사람처럼 되어버렸고 그 결과 영적으로도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기도해서 세상의 유혹을 이겨내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100% 실패합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는 것을 의존하여 자신을 하나님처럼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우상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마음,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한 견고하기 원하는 마음을 스스로 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폭로하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내내 폭로당한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가요? 성경이 얘기하는 구원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본질적 옛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새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폭로’입니다. 옛 사람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우상숭배를 좋아하는지 폭로 당해야 합니다.
옛 사람이 이끄는 대로 세상과 짝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으면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직접 그것을 경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너무 좋아 보여서 내가 욕망에 따라 그것들을 붙들었는데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 얼마나 큰 갈등과 고통과 파괴를 가져오는지 직접 경험하여 옛 사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우리는 넘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진 자리에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저는 세상을 너무 좋아하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제 스스로는 하나님을 의존할 수 없습니다. 은혜로 구원하여 주세요.’ 세상의 힘든 과정을 지나며 꼭 이 고백을 하시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성도가 힘들고 악한 세상 속에 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하나님만이 악으로부터 구원하심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vv.7-11
두 번째로 성도가 힘들고 악한 세상 속에 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만이 악으로부터 구원하심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우상숭배는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개입하십니다. 인간은 우상숭배를 안 하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욕망을 이루어줄 대상을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마음을 우상 공장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공장처럼 계속 우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속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나요? 8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
구산 리사다임의 뜻은 ‘두 배로 더 악한 놈’입니다. 단순히 힘든 것이 아니라 두 배로 더 악한 상황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의존하고 우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했는데 두 배로 더 악한 놈이 달라붙어 고통하게 만드는 것, 하루 이틀도 아니고 8년입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하게 되는 반응이 무엇인가요? 9절입니다.
[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하나님은 이 부르짖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언제 부르짖나요? 하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인생에 고통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두 배가 아니라 어떤 때는 세 배, 다섯 배, 열 배로 악한 놈이 나만 괴롭히는 것 같은 과정을 지나가더라도 하나님 백성은 이때 여호와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십니다.
옷니엘의 뜻은 ‘여호와는 강하시다’입니다. 두 배로 악한 놈, 아니 열 배로 악한 놈이 달라붙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강하고 유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자 옷니엘을 세우신 것입니다. 10절에서 어떻게 구원하시나요?
[10]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옷니엘 자신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엄청 강력한 나라의 왕보다도 힘이 크신 하나님이 함께하셨더니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얼마 동안 계속되나요? 11절입니다.
[11] 그 땅이 태평한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
문제는 구원자가 임하여 태평하다가 구원자가 죽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우상숭배에 빠져든다는 것입닌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 안에는 너무나 많은 우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언제 깨닫나요? 두 배로 더 악한 놈으로 고통하다가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까지 아파서 병원에 있었습니다. 어디서 들어온지도 모르는 병균으로 고열과 전신 통증에 2주 이상 시달리고, 원인을 모른다는 불안함과, 같은 병실의 환자들의 폐렴과 치매와 심한 상태를 보며 인생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고 몸소 경험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퇴원을 하고도 몸상태가 불안정 하던 중에 우연히 송정미 님의 찬양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가장 민감하던 2, 30대에 크게 은혜를 받았던 찬양들을 한 시간 이상 들으며 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의 저의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갈망과 또 하나님이 만나 주시고 응답하셨던 시간들이 주마들처럼 스쳐갔기 때문입니다. 그때 제가 안정에 대한 제 우상이 너무 커졌음을 깨달았습니다.
양재로 저희 교회가 이사 올 때만 해도 꿈에 부풀었는데 바로 코로나가 시작되며 모든 것은 무너진 것 같고, 인생 별거 있겠나 하는 패배감에 은퇴할 날을 세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제 영혼 깊숙이 숨어있던 안정이 요구하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20대 때 ‘변화도 없고 자극도 없고 은혜도 없는 평범한 삶 살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찬양을 들으며, ‘하나님 저를 통해 세상의 영혼들이 구원받게 해주세요. 어두운 북한 땅에 예수의 생명이 전파되도록 저를 사용해주세요. 영혼이 무너져버린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회복하는 은혜를 맛보게 해주세요. 예수 알지 못하는 자들이 예수의 생명을 얻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었는데 이제 상황이 안정되자 ‘평안한 삶을 깨뜨리지 마, 모험하지 마, 이대로 가’라는 안정의 거짓말에 제 영혼이 얼마나 깊이 빠졌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찬양을 들으며 그 마음을 회개하며 울었습니다.
찬양 내내 저는 제 20대와 30대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의 응답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잊어버리시고 그냥 이렇게 살도록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다 기억하시며 ‘네가 기도한 대로 일하고 있다, 우상숭배를 회개하면 내가 너를 통해 일 할 것이다’라는 음성을 들으며 지난 주일이 저에게는 영적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아프고 고통한 과정을 통해 제 영혼에 깊이 달라붙어 있던 무서운 안정이 드러나고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난을 겪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에 늘 매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꿈과 어떤 은혜를 주셨나요? 혹시 그것을 잊어버리고 지금 우상이 이야기하는 대로 세상을 즐기며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우상숭배를 회개하며 벗어나 영적 은혜와 만족을 누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