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2]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저는 20대 때 큰 은혜를 받고 수도사가 되고 싶어서 수도사에 대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찾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 수도원 중 가장 엄격하다고 알려진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일주일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한 대화는 수화로 나누고, 일주일에 한 시간 주어지는 대화 시간을 제외하고는 종일 기도하고 성경 묵상하고 노동을 합니다. 또한 몸에 기름진 것이 들어오면 정욕이 생긴다고 여겨서 일주일 내내 수프와 딱딱한 빵을 먹으며 버팁니다.
이렇게 힘들고 재미없는 삶을 제가 왜 동경했을까요? 은혜를 받고 영적인 세계가 아름답다는 것을 일시적으로 경험하고 나니 육신적 삶이 너무 초라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맛있는 것 먹고 싶고, 재밌는 것 하고 싶은 제 육신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육신을 만족시키는데 꼭 필요한 돈이 없다는 데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도 있었습니다.
아무 유혹도 없는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쯤 헨리 나우엔의 <제네시 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하버드대 교수로 기독교 영성과 관련된 책을 많이 쓰신 이 분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제네시 수도원에서 7개월간 수도사들처럼 생활한 일상을 일기로 적은 것이라 저에게 딱 맞는 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서 저는 수도원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수도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도 유혹은 시시때때로 인간을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매일 생기는 내적 갈등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내가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을 누군가 기억하고 편지 써 주기를 기대하며 우편함을 서성거리고, 동료들이 나를 잊지 않았는지, 손님이 오면 하버드대 교수님을 찾지는 않았는지, 또 외진 곳을 찾아왔으면서도 매일 새로운 일이 없는지 찾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괴로워하는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유혹받는 본질 자체가 인간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어도 마음은 여전히 유혹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떠나서 유혹을 피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살아가며 유혹받는 본질이 무엇인가 깨닫고 우리 힘으로는 유혹을 벗어날 수 없음을 하나님께 고백하여 구원을 받아들이기 원하십니다.
삼손은 ‘세상에서 노예된 자’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삼손은 유혹에 끊임없이 넘어갔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유혹을 찾아다닙니다. 아마 힘이 강한 만큼 강렬한 정욕이 있었는지, 삼손이 가장 약했던 부분이 바로 성적인 욕망이었고 이것으로 결국 올무에 걸리어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성도가 언제 세상의 노예가 되는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언제 세상에 노예가 되나요?
1.정욕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일을 행할 때입니다. vv.1-3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삼손 스토리 중 가장 의외인 구절입니다. 지난 몇 주의 설교를 상기해 보면 삼손이 과연 사사인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삼손은 블레셋 사람 천 명을 한 번에 때려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사사로 다스리고 있었지만 자기 안에 있는 본질적 유혹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삼손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1절입니다.
[1]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블레셋 다섯 개 도시국가 중 가장 큰 도시가 ‘가사’였습니다. 가사는 삼손의 동네와 70km 떨어진 곳으로 대략 서울과 천안 거리입니다. 자동차가 있던 시대도 아니고, 도보로 하루 최대 갈 수 있는 거리가 30km 이내이니 삼손은 이틀을 걸어가 창녀를 찾은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였기 때문입니다. 동네 근처에서는 체면도 있고 하니, 자신을 알아보는 이스라엘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정욕을 채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블레셋에 미움을 받는 존재인데도 왜 적진의 중심지까지 갔을까요? 삼손의 자만심입니다. ‘천 명을 죽인 나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해’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은 피하지만 블레셋인들에게 들키거나 죽임당할 두려움은 없었던 것입니다. 2절에 위기가 닥칩니다.
[2]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두 번이나 반복되는 구절이 ‘밤새도록’입니다. 블레셋 인들도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맞서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밤새 매복했다 삼손이 깊이 잠들었을 때 급습을 준비했습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잠은 자야 되니까 지금 위기의 순간입니다. 삼손의 반응이 3절에 있습니다.
[3]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삼손도 이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잠든 척 누워 있다 일어나 나온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을 합니다. 그대로 도망치지 않고 가사의 성문과 대들보까지 뽑아서 등에다 메고 갑니다. 성문은 성 전체를 지키는 상징이니 성을 정복했다는 자만심과 과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문을 떼어서 놓고 갔을텐데 삼손은 그것을 들고 유다 지파의 근거지인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갔습니다.
가사로부터 헤브론까지는 60km 떨어져 있으며 가사는 해변 옆에 있고 헤브론은 약 900m가 넘는 산길을 올라가야 있는 지역입니다. 한국의 지형으로 치면 강릉에서 대관령까지 수백, 수천 킬로의 문짝을 짊어지고 언덕길을 올라간 것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유다 지파 3천 명은 삼손을 묶어 블레셋에게 바쳤습니다. 삼손은 아마도 그들에게 ‘나는 가사의 성문을 떼 올 정도로 강한 사람이야. 너희는 두려워서 나를 바쳤지만 앞으로는 그런 짓을 하지 마’라는 본보기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기도 삼손의 깊은 자만심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모두 욕망대로 움직입니다. 소심한 사람들은 합법적인 둘레 안에서 욕망을 실현합니다. 욕망의 문제는 중독도 있지만 한계 효용의 법칙에 의해 기쁨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커피, 음악, 수집 등은 아주 세련된 욕망이지만 점점 깊은 세계로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미적 안목이 있는 사람은 일반적인 것으로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남이 못 해 본 것, 남은 모르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돈도 노력도 많이 들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합법한 것이지만 때로는 법에 저촉되면서까지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은밀한 욕망을 추구할 때는, ‘나는 안 걸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삼손의 자만심이자 세상의 노예의 착각입니다. 인간이 어떠한가를 알려면 그의 은밀한 행위를 보면 됩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 제목이 너무 좋았습니다. 윌로우크릭 교회는 성도가 2~3만 명이고 리더십 세미나를 열면 2만 명의 목사들이 전 세계에서 모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하이벨스 목사님이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여러 명의 여성들과 불륜과 성폭행을 해서 조기 사퇴를 했습니다. 법정으로 가지 않고 지분 없이 물러나는 걸로 합의를 봤습니다. 윌로우크릭 교회는 그 이후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고 더 이상 세미나도 개최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은밀한 욕망’은 언젠가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밀한 욕망을 추구하고 계신가요? 은밀한 욕망의 무서운 점은 결국 누군가를 파괴하고서야 끝이 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실 때가 바로 멈춰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자만심이 너무 커서 난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숨기고 계신다면 언젠가 무서운 세상의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집요하고 무섭게 우리 영혼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언제 세상에 노예가 되나요?
2. 어두움을 사랑하여 진리를 저버릴 때입니다. vv.4-22
두 번째로 언제 세상의 노예가 되나요? 어둠을 사랑하여 진리를 저버릴 때입니다. 4절입니다.
[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삼손은 아직도 자만심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정력이 왕성한 사람이 20년째 사사였는데,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가족이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합니다. 너무 강력한 힘과 능력이 있으니까 일상적이지 않은 것, 특별한 것에 대한 열망이 커져서 소렉 골짜기까지 찾아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전에는 눈으로 자극되니까 성관계를 맺었고 욕구가 충족이 되면 더 이상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를 사랑합니다. 마음을 주고 하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즐길 수 있지만 사랑을 하면 끊어낼 수 없는 일부가 됩니다.
성경은 이들의 이름을 통해 삼손의 사랑이 옳지 못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의 뜻은 ‘태양’입니다. 들릴라는 ‘밤, 어둠’입니다. 즉 히브리어를 그대로 읽으면 ‘태양이 어둠을 사랑하더라’입니다. 자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빛이 존재하는 곳에 어둠은 반드시 떠나가게 되어 있고 빛과 어둠은 함께하지 못합니다. 태양으로 부름 받은 삼손이 어둠을 사랑하기 시작하자 어둠이 세상의 도구가 되어 삼손을 집어삼킬 준비를 시작합니다. 5절입니다.
[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천백 개씩을 네게 주리라 하니
삼손은 지금 우리가 헬창이라고 부르는 몸집이 거대하고 알통이 튀어나온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힘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균적 체형이라 힘의 비밀이 궁금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은 천백 개를 블레셋 다섯 도시에서 갹출한다면 오천오백입니다. 당시 노예 한 명 값이 은 30개였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수십억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세상이 돈의 위력으로 회유하자 들릴라가 바로 삼손을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6절과 7절입니다.
[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7]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아무리 사랑했어도 상대가 이렇게 얘기하면 눈치를 챌 만도 한데 삼손은 배후를 의심하지 않고 수수께끼 하듯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해서 마음을 주고 나자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들릴라는 멈추지 않고 또 묻고 삼손은 또 대답합니다. 11절입니다.
[11]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이것도 거짓말임이 금방 들통나고 들릴라가 세 번째 시도합니다. 삼 세 번이나 되었다는 것은 심각한 것인데도 삼손은 경계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답에 근접한 답을 줍니다. 13절입니다.
[13]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 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하는지라
일반 밧줄에서 머리카락으로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어둠이 점차 빛을 삼키려는 상황입니다. 이것도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나자 16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사랑하지 않았으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기 전에 떠났을 것입니다. 사랑해서 마음을 주자 오히려 삼손의 영혼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죠. 왜인가요? 그 여인을 얻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결국엔 세상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며 번뇌케 합니다.
세상 사람은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일에 번뇌를 겪지 않습니다. 그들은 로또를 사면 기대감이 충천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데 이런 것을 사도 될까’ 번뇌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나님 백성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고 충돌한다면 우리는 고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모습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점차 세상으로 깊이 빠지다 보니 번뇌를 겪는 것입니다. 결국 17절 상반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17a]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
이것은 하나님이 삼손에게만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그런데 들릴라의 사랑을 얻고자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내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 나만을 섬기라’라고 말씀하시지만 많은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다가 세상에 마음을 내어주고 결국 유혹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될 선택을 하고, 나는 아닐거야, 라며 진리와 타협합니다. 17절 하반절입니다.
[17b] …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삼손은 잘못 알고 있습니다. 머리털은 삼손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표징에 불과합니다. 삼손의 힘이 왜 약해졌는지 20절 하반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20b] …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머리털이 없어졌다고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은 하나님이 삼손과 함께하신다는 증표였고 그가 진리를 포기하여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하나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가장 비참한 것은 가난해지거나 병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병에 걸려봤고 지독한 가난도 겪어 봤는데, 병을 통해 오히려 열심히 운동하고 절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으면서 돈에 대한 무서운 유혹과 힘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병과 가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진짜 저주는 하나님이 인생에서 떠나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지는 않으시지만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떠나시자 삼손에게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지 21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세상에 노예된 자의 전형적 그림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인간의 가장 비참한 상태 중 하나를 장님으로 묘사합니다.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상태.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고 하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데도 그걸 볼 수 없이 세상에 매인 처량한 상태입니다.
또한 놋줄에 메어 옥에 갇혀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 내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이것은 중독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를 중독시킵니다. 술이나 마약, 도박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커피, 음악, 운동처럼 합법적인 것들도 중독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삼손은 맷돌을 돌립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365일 맷돌을 돌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지루함이 누구에게 제일 고통스러운가 하면 삼손 같은 사람입니다. 삼손은 쾌락을 추구하는 정욕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일상적인 것을 벗어나기를 원하고 모험과 스릴을 즐깁니다. 이런 사람에게 맷돌이 제일 고통스러운 형벌이 됩니다. 삼손은 세상에 노예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망적인 삼손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22절에 소망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다음 주에 보시겠지만 하나님은 삼손에게 한 번 더 임하십니다. 눈이 뽑히고, 놋줄에 매이고, 맷돌을 갈며 고통하는 노예 삼손이 자기를 희생해 사사로서의 마지막 구원을 완성하고 죽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살리실 놀라운 구원의 모형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며 가장 먼저 선포하신 것이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입니다.
눅 4:18-19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가난한 자가 바로 삼손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서 인정받고 싶고 돈과 여자로 마음을 채우고 싶어서 유혹을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또 삼손은 포로되고, 눈 먼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아 세상의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고자 오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중독된 우리를 구원하시며 하늘의 생명으로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고자 오셨습니다.
이 땅을 사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단순히 하는 일이 똑같아서 그런가요? 마음에 만족과 기쁨이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과 30절입니다.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삼손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주십니다. 삼손의 마음은 교만하고 완악했습니다. 완악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명령을 하셔도 받아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만은 무엇인가요? 자만심에 가득 차 내가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힘은 우리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여져서 내 힘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존하여 하나님이 옳다고 하면 바로 순종할 수 있는 힘입니다. 내 자유를 추구하는 자는 삼손처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함으로 그분이 주시는 그 자유와 쉼을 이 땅에서도 맛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