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지난 몇 주간 살펴 보았던 삼손의 일생이 오늘 본문으로 끝이 납니다. 설교하기 전에는 삼손이 아주 특별하고 저와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설교를 할수록 동질감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보는 것, 먹는 것, 아름다운 소리, 재미있는 것 등 감각적 유혹에 취약한 모습,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분노하는 모습, 또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왜 나한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느냐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모습, 또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기보다 나의 필요만을 간구했던 모습 등이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삼손처럼 살 수밖에 없는 저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비참한 결국으로 끝나지 않도록 인도하고 계신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삼손은 죽음 앞에서도 일생에 일관적으로 보였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삼손의 죽음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삼손의 죽음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1.이기성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vv.23-28
첫 번째로 이기성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23절 말씀입니다.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블레셋은 5개의 큰 도시 국가로 이루어진 나라였습니다. 여러 도시들의 방백들이 모두 모여서 다곤 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삼손 한 사람 때문에 블레셋 전체가 오래 힘들었는데 삼손을 결국 사로잡아 눈을 뽑고 비참하게 만들자 신이 도우셨다고 제사를 드리며 기뻐한 것입니다.
이들이 함께 모인 다곤 신전은 블레셋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 이전에 섬기던 신 중 하나였습니다. 다곤은 바알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다곤이 낳은 아들이 바알이고 바알의 영향력이 아버지보다 더 커지면서 바알 숭배는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다곤도 이들이 원하는 농경과 또한 전쟁의 신이었기에 이들이 농사짓는 데 피해를 준 삼손을 결국 붙잡게 되자 신이 우리를 도왔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방백들뿐 아니라 백성들 또한 이 일로 기뻐하며 함께 모였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높은 사람이나 일반 백성들이나 다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군인만 죽인 게 아니라 일반 백성의 논밭을 다 불태웠던 삼손이 비참하게 잡힌 것을 보고 이들은 신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들은 신만 찬양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삼손을 불러냅니다. 2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25a]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
한글로는 ‘재주를 부리다’라고 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entertain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삼손이 어떤 일을 한 것일까요? 삼손과 관련된 영화들을 찾아보았더니 눈 먼 삼손을 광장에 세워놓고 난쟁이들이 막대기로 삼손을 치고 삼손은 그들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다 넘어지는 걸 보고 사람들이 웃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재주를 부리다, entertain하다’라는 표현이 바로 삼손이 일생 내내 자신을 위해 추구했던 바입니다. 삼손은 자기 눈을 만족시키고, 식욕과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성이 큰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방식입니다.
재미있는 것, 맛있는 것, 더 아름다운 것을 좇다가 세상의 강력한 유혹에 쉽게 넘어지고, 나중에는 세상에 희롱당하는 비참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삼손의 모습은 세상에 사로잡혀 유혹에 넘어간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생 내내 눈을 의지하고 살았던 삼손은 눈이 뽑히고 나자 이제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25절 하반절과 26절입니다.
[25b] …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눈의 유혹에 약했던 삼손은 눈이 뽑히고 나니까 스스로 아무것도 주장하고 결정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도움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삼손은 소년의 도움을 받아 신전의 가장 큰 기둥에 기대어 섭니다. 이 신전은 엄청난 규모였던 것 같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고대의 신전들은 큰 광장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붕을 만듭니다. 지붕이라고 해서 지금처럼 완전히 덮는 지붕이 아니라 기둥 위에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판판한 곳이었습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아랫부분에는 높은 사람들이 앉고 나머지는 2층에서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구조였습니다. 그 지붕에 3천 명이 올라가 있다고 하니 신전의 규모가 엄청난 것입니다. 블레셋 전체 사람들 가운데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방백이라는 높은 사람들,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신을 찬양하며 삼손을 놀리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삼손이 얼마나 좌절되었을까요?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얼마나 울분이 가득했을까요? 삼손은 이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8절 상반절을 보시면
[28a]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
삼손이 부르짖었다는 사실만으로 이제야 삼손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 기도는 성경의 어떤 기도보다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눈이 뽑히고 포로가 된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인가요? 삼손이 자기 욕망을 따라가다 도착한 자리입니다. 나실인으로 부름받았는데 블레셋 여자를 쫓았고, 진리를 버리고 여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비참한 상태 가운데 맨 처음에 해야 될 게 무엇일까요?
하나님 저의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제 존재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는 자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반응 아닐까요? 성경에는 이런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요나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회개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자가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기 위해 먼저 해결해야 되는 것이 죄 문제입니다.
삼손이 처음으로 하는 기도는 자기를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분께 큰 잘못을 해서 관계가 틀어졌는데 대뜸 전화가 오더니 왜 내 생각 안 해 주냐고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하면 얼마나 화가 날까요? 관계를 먼저 회복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삼손은 이렇게 끝까지 이기적입니다. 그리고 나서 당장 또 무엇을 요구합니다. 28절 중반절을 보시면
[28b] …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
삼손에게 하나님은 자기가 필요할 때 힘을 주는 분입니다. 이전에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힘을 주셨나요? 사실 삼손만을 도우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시고자 했고, 또한 삼손을 통해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자 삼손의 인생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계의 회복을 요구하십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과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참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삼손은 본성 자체가 이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도 이렇게밖에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삼손은 힘이 꼭 필요한 이유를 28절 하반절에 이야기합니다.
[28c] …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눈이 뽑힌 것이 너무 억울하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왜일까요? 눈이 삼손의 가장 큰 욕망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잘 보지 못했다면, 아니 눈에 대한 유혹에 약하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여인들을 쫓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생 내내 가장 열망하고 정욕을 채우고자 사용하던 것이 인생에서 사라진 것이 너무 억울한 것입니다.
나실인이며 사사이니 삼손이 원수를 갚겠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이렇게 기도가 시작되어야 하지 않나요? 사사이지만 자기 잘못으로 잡혀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이유조차 눈 뽑힌 게 억울한 개인적 원한 때문입니다. 이 본질에서부터 자기중심성으로 똘똘 뭉친 삼손을 통해 하나님은 죄악에 매인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지난 몇 주간 삼손을 살펴보았지만 사실 삼손은 우리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런 삼손을 택하신 것입니다. 한 존재 안에 강력한 정력과 힘이 잔뜩 가지고 태어난 삼손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사며 나실인으로 부름 받았지만 비참하게 세상의 노예가 되어 결국 두 눈이 뽑힌 채로 노리개 감이 되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삼손과 같은 인생을 동경합니다.
머리가 좀 더 좋았다면, 건강이 좀 더 좋았으면, 돈이 좀 더 많았다면. 삼손은 세상이 원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자였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무엇인가요? 그 시대의 힘, 지금으로 치면, 똑똑하고 건강하고, 돈이 많았더니 세상의 강력한 유혹에 사로잡혀 결국 이런 이기적이고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만족시켜줄 것이 어디에 있나를 찾아다니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영혼의 공허를 채우시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삼손 이야기를 통해 은혜가 없이는 세상에 유혹받아 넘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삼손의 죽음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2. 죽음으로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vv.29-31
두 번째로 삼손의 죽음은 무엇을 보여주나요? 죽음으로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29절과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수천 명이 올라가 있는 지붕 기둥을 무너뜨리니까 연쇄적으로 기둥과 지붕이 모두 무너져 내려서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다 돌에 깔려 죽었습니다. 지금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것이면 이렇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고대 건물의 기둥들은 돌 위에 돌을 얹어놓은 형태였습니다. 중간에 받쳐주는 것이 없자 연쇄적으로 다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 무엇을 이루었나요?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지붕에 3천 명, 광장에도 수없이 많이 모여 있다고 했는데 이들은 블레셋의 방백들, 블레셋에서 제일 중요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 죽음으로 이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삼손의 인생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사사기 14장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쉬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14:4 [쉬운성경] 삼손의 부모는 여호와께서 이 일을 계획하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칠 기회를 찾고 계셨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처럼 훌륭하고 멋진 지도자를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세상에 완전히 빠져 세상 사람처럼 되어버린 사람도 사용하시어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삼손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모형입니다. 어떤 면이 예수님과 같나요?
나실인인 삼손처럼 예수님도 나사렛 출신인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되신 분이셨습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에 있다 블레셋으로 간 것처럼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도 이 땅에 내려와 죄인처럼 되셨습니다. 삼손이 성령을 받아 놀라운 구원을 베푼 것처럼 예수님 또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삼손이 세상의 포로가 되어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처럼 예수님 또한 세상의 포로가 되어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삼손의 모습이 예수님을 아주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삼손을 통해 구원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8절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나요?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이 인간처럼 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또한 죽음으로 나아가시기 위해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7절부터 30절을 보시면
마 27:27-30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마치 삼손이 희롱당하듯 예수님 또한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군병들은 이렇게 희롱할 수 있었을까요? 이 희롱당하던 분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얘기하나요? 골로새서 2장 15절입니다.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에서 그들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손처럼 수천 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고 끝났습니다. 예수님도 멋지게 심판을 보였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영적으로 임한 것을 보여주십니다. 육적으로 몇 천 명 죽이고 끝나는 종류의 심판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영원히 결별되는 무서운 심판의 선고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눈으로 나타난 강력한 심판의 모습이 아니기에 십자가는 여전히 이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르는 중요한 갈림길이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무엇이라고 얘기하나요?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 또한 세상에서 늘 넘어지고 유혹받고 또 세상이 좋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나요? 세상에 넘어져 본 사람, 유혹에 넘어간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창피하며 세상에 매인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깨달은 자만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유혹당하고 넘어질 때 때로 허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가보고 넘어지고 회개한 분들이 교회에서 간증을 자주 하시다 보니 그것이 일반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작은 유혹에 넘어질 때마다 십자가 앞에 빨리 나아가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더 비참하고 더 어두운 자리에 임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자유케 하시는 이 십자가의 은혜를 이 땅에서 맛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