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4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삿 33: 개인과 영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교회(삿 17:7-13)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11]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교회의 상태는 개인에게 깊이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면 교회에 속한 개인들도 건강하고 교회가 건강하지 않으면 개인들도 건강하지 않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은 교회에는 항상 문제가 많고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없이 혼자 신앙을 지키겠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기가 태어나서 나는 부모 형제가 필요 없으니 혼자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신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지난주부터 우리는 미가의 가정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사실 이것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상황이었습니다. 특별히 사사기 17장부터 나오는 모든 문제의 원인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는 종교 집단들이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한 종교 지도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이스라엘 내에 유대교라는 종교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을 보여줍니다. 결국 교회가 건강하지 않으면 교회와 연관된 개인들이 어떤 삶을 사는가를 성경이 보여주고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개인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교회는 개인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1.교회의 붕괴는 개인의 영적 타락을 가속화합니다. vv.7-10
첫 번째로 교회의 붕괴는 개인의 영적 타락을 가속화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하나님이 레위인과 제사장에게는 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땅이 없는 이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지파들이 낸 십일조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들의 참된 생명이며 삶의 능력임을 보여주시고자 샘플로 레위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모두가 생업을 그만두고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으니까 레위인과 제사장이 대표로 하나님을 섬기고 나머지는 그들의 생업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은 땅이 없이 이스라엘 전역에 정해진 48개의 성읍에 흩어져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종교 시스템이 잘 유지되고 있을 때는 사람들이 내는 십일조로 레위인이 충분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반복되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도 부르고 하나님께 헌신도 하고 복 받기를 기대하지만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헌신하는 대상은 바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기 시작했고 유대교 시스템이 붕괴된 것입니다.
여기 등장한 레위 청년은 베들레헴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에 속한 곳으로 하나님이 레위인에게 주신 성읍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자기 고향에서 굶어 죽게 되자 그 곳을 떠나 떠돌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음 장에 보면 청년의 이름이 요나단임을 언급하지만 이곳에서는 일부러 청년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즉 이 일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여기저기를 다니다 산 위에까지 올라왔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돈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풍족한 사람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고대에 자기 집에 은 천백이나 되는 수억 원의 현금을 가지고 있었으니 아마 지역에서도 이미 큰 부자였을 것입니다. 이 청년은 본능적으로 생계를 해결하고자 찾아간 것입니다. 9절 말씀입니다.
[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레위인이면 자기가 속한 성읍이 있을 텐데 유다 베들레헴에서 왔다는 자체가 나는 이곳저곳 떠도는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고대에는 출신지가 중요했습니다. 여기서도 사실 자기 고향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그 이전부터 계속 떠돌던 터이라 최근 거주지만 이야기한 것입니다. 10절 상반절을 보시면 미가의 관심은 그의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10a]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
사실 지금 미가는 집에 모든 종교 시스템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신당과 우상이 준비되어 있고 제사장만 없어서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제 발로 찾아오자 아예 개인 제사장으로 초대합니다. 원래 유대교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으면 레위인이 떠돌고 있을 일이 없지만 유대교가 붕괴되고 나니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하는 이들은 떠돌기 시작하고 개인들은 집에 신당도 우상도 제사장도 마음대로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 열심 있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엄청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한 율법에 의해 완벽하게 성막의 모형을 주셨습니다. 이 성막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 수십 장에 걸쳐서 길이, 색깔, 모양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질 구원과 생명을 미리 가르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 방법 외에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개인 신당에서 개인 우상을 통해 하나님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배치되는 악인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제사장으로 삼으면서 아버지가 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 ‘청년’은 아직 서른이 되지 못한 20대의 젊은이를 지칭하는데, 유대에서는 서른은 넘어야 어른으로 인정받고 자기 일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30세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20대의 청년을 영적 아버지로 섬기겠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영적 태도입니다. 미가는 말로는 누구보다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가의 실체는 1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11] …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아버지로 섬기겠다고 한 청년이 ‘아들’처럼 되었습니다. 아버지로 섬기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아들처럼 대하며 자기가 원하는 답을 요구한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 물질적 보상을 제공했습니다. 10절 하반절을 보시면
[10b] …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은 한 세겔은 노동자의 4일치의 노동력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은 열은 40일치입니다. 약 한 달치가 연봉인 것입니다. 이 금액이 어디서 산출됐을까요? 미가 자신이 열흘 정도에 한 번씩 쯤 예배가 필요할 때 예배를 드려주면 그 정도의 보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 적은 액수이지만 대신 숙식이 제공됩니다. 떠돌이에게 의식주가 해결되니까 레위인은 동의합니다.
목회자들 가운데도 생존에 따라 선택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불행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즘 시대가 점점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저희 노회에도 목회만으로 생존이 안 되어서 편의점이나 쿠팡 알바를 병행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점점 교회나 종교 시스템이 붕괴되어 생존에 따른 결정이 우선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신학교에 지원조차 하지 않습니다. 생존이 안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3~4년 전부터 시작된 미달 상황이 앞으로는 심해질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신학교에 왔더라도 파트타임으로 교회를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습 기간을 훈련과 은혜의 시간으로 여기지 않고, 적은 봉급으로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주중에 알바로 돈을 벌겠다고 하며 주일에는 큰 교회를 다닙니다. 고난을 인내하고 은혜를 바라는 것보다 생존이 중요해진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다니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100만이라고 했었는데 작년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지금은 230만 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이 숫자는 약 5년마다 거의 10%씩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때에는 천만 성도라고 했었는데 지금 매주 교회 나가는 사람은 약 500만 명 정도로 앞으로 10년 뒤에는 이 숫자가 더 폭락해서 문 닫는 교회들이 도처에 나타날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 중 주일 학교가 없는 교회가 사실 43%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주일학교의 아이들의 숫자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이것은 나라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노령화도 문제이지만 신학교에서는 여전히 일 년에 수천 명씩 목회자를 배출하고 있고 교회들은 큰 건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의 시스템이 유효하지 않는 위기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미가와 같은 개인이 우상숭배에 빠져 악을 행하는 상황을 오히려 가속화시키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붕괴되면 아무리 개인이 잘 살아보려고 해도 믿음과 복음의 길을 걸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만 괜찮으면 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다 같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나요? 6절입니다.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내 생각, 내 욕망, 내 뜻이 중심에 서게 될 때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교회가 온전히 회복되고 개인의 신앙이 온전하게 되는 방법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모든 기준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약속을 원하지만 복음은 ‘지금 그 고난 자체가 하나님이 개입하신 증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짜 주시고자 하는 참된 복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한 영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이 땅의 광야에서 옛 사람을 다 잘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일부가 잘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보살피고 성장시키고 밴드도 붙이고 약도 칠해서 이 모습을 끌고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갈림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복음의 본질에서 떠나가게 됩니다. 이 갈림길에서 참된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심으로 위기 가운데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교회는 개인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2. 교회가 무너지면 개인의 기복적 도구로 사용됩니다. vv.11-13
두 번째로 교회는 개인과 어떤 연관성이 있나요? 교회가 무너지면 개인의 기복적 도구로 사용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11]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될 레위인이 일 년에 한 달 치 월급과 옷과 밥에 만족했다니 안 될 말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너무 힘들게 살았고 못 먹고 못 입었기 때문에 겨우 생존이 채워지는 것으로도 만족하는 인생,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저주 같은 인생입니다.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니까 만족하고 기쁘다면 도대체 하나님 백성이 왜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업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레위인 처럼 하나님을 섬김으로 받는 생명과 은혜입니다. 잘 먹는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영적 만족이 충족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이구나,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구나, 모두가 생존에 매여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풍요의 만족을 경험하는 것이 행복이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레위 청년이 미가의 아들과 같이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준을 세워주고, 자녀가 잘못 가면 훈육하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밥과 옷에 만족한 청년은 그런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상부터 치우고, 개인 종교 시스템을 치우고, 당신이 원하는 복을 하나님께 강요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12] 미가가 그 레위인을 거룩하게 구별하매 그 청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미가는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미가는 깊은 종교성이 있었고 비슷한 얘기가 3절에도 있습니다.
[3] …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
엄마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하여 온 존재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이 모든 일의 본질은 13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복을 얻고자 함입니다. 이미 큰 부자이지만 더 얻어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뻥 뚫린 무저갱 같아서 늘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부족함을 채워줄 누군가를 기대하고, 신앙의 도움을 받아 부족함을 벗어나고자 열망하는 마음으로 신앙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이 때 복음을 듣지 못하면 하나님을 오해하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자리에서 제사장이, 목회자가, 교회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개인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깊은 기복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모태신앙이고 수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본질적 욕망과 영혼 안에 내재된 우상숭배적 경향이 깨지는 데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개입이 있었습니다. 매일 몇 시간씩 울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인생이 박살나야 깨달은 복음이 있었기에 지금 매주 일관되게 복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설교하지 않는 목사님들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안경이 없이 어떻게 뚜렷이 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신 사람만 눈이 열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분이 없지만 초반 몇 년은 왜 힘들게 죄 얘기만 하냐고 설교 후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축볻 받고 잘 된다는 얘기를 해 달라고 하다가 결국 교회를 떠나셨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진짜 잘 된다는 이야기라서 매주 하고 있습니다.
암 환자한테 밴드 붙여주면서 잘 될 거라고 하는 의사가 좋은 의사인가요? 상태를 정확히 얘기해 주고 치료 안 받으면 3개월 후에 죽는다, 치료 잘 받으면 20년 더 살 수 있다, 정확하게 얘기해 주어야 합니다. 아무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는 환자에게 잘 될 거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고 악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사랑도 계속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일관되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 위기 상황 가운데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까요? 정답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끝까지 복음의 길이 맞다고 믿고, 우리만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위해 계속 기도하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복종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우리가 함께 기도하며 끝까지 복음의 길 가운데 서 있을 때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함께 경험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