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일 주일예배 설교문
첫사랑을 아련하고 좋았던 기억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로 인해, 첫사랑을 노래하는 노래 혹은 첫사랑을 묘사하는 소설이 아주 인기 있습니다. 왜 이렇게 첫사랑을 아련하게 기억하는 것일까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첫사랑을 청소년기의 끝이나 20대에 하게 되는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이 시기에 자기중심적 미성숙함이 가득합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은 크고, 완벽한 사람을 만나 갈망이 채워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만나면, 열망은 채워지지 않고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아주 유사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기억할 때, 과거의 첫 사랑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때는 신앙이 좋았던 것 같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넘쳤던 것 같은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첫사랑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수록, 지금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본다면 피상적인 관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처음 관계를 맺을 때,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미성숙함이 변화되지 않으면, 예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발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1. 기복적 믿음 때문입니다. v.23
[23a]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성전청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은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왜 표적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기적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지만, 표적이라는 단어는 ‘세메이온’이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단어로, 영어로는 ‘싸인’으로 번역됩니다. 간판이 음식점은 아니지만, 간판을 보면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표적은 실체를 지시하는 표징을 말합니다. 원문을 직역해서 번역하는 영어 성경은 ‘싸인’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는 의역하는 영어 번역들은 ‘기적적인 싸인’이라고 번역합니다. 무엇을 보여준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셨으나, 이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그가 누구신지 알려주는 싸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모든 표적은 그가 메시야임을 보여주는 싸인이었습니다. 표적을 보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며 감탄하며 나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도록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경이 약속한 바로 그 메시야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싸인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
[23b] …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사람들이 마치 믿음을 가진 것처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라는 그 이름의 뜻을 받아들인 정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무엇인가요? 구원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난과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성공시켜주고 부자로 만들어 줄 분으로 믿은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보이는 분이라면 그를 따라 가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며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은 무엇에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일까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중요한 포인트가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구원을 베푸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세상 가운데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을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예수님과의 관계가 두 가지의 길이 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에서 좋은 것을 행할 분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욕망의 해결자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일까요? 이것은 기복적 믿음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의존하는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코인을 하는 청년이 많다고 합니다. 작년 1년간 코인 계좌가 몇 백만 개가 개설되었다고 합니다. 코인을 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간 돈을 많이 벌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다 믿음이 있습니다. 심지어 귀신들도 믿음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이런 종류의 믿음은 지적 믿음입니다. 어떤 정보가 확실하다고 믿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믿음은 우리보다 귀신이 더 확실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이 계신가라는 헷갈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고난이 닥칠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귀신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뛰어남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인가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나의 다른 의존을 다 내려놓고, 그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은 내가 맞다는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이 있어서 믿는 믿음은 반드시 마귀에게 유혹을 받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기적이라는 단어는 한글로 딱 한 번 번역되고 있습니다.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살후 2:9-10)
여기에 딱 한 번 기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마귀가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은 기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구원자를 받아들여 반응하라는 ‘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기적을 보입니다. 구원받지 못할 자들을 분리하기 위해 거짓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마귀가 행하는 일에 속아 넘어갑니다. 미국에서는 한국보다 tv 채널이 훨씬 많으며, 기독교 방송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든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방송을 하는 데에는 수천만 달러가 든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방영하는 많은 기독교 전도자들이 있는데, 대부분 기적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에도 ‘성령님 안녕하세요’를 쓴 베니 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방송이 나아가고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입니다. 베니 힌이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는 이유는 병을 치료받았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베니 힌의 재단에서 일한 사람들이 양심고백을 하였는데, 이는 다 속임수라는 양심고백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어 자신도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채널을 구독하며, 광고한 것들을 삽니다.
저도 외삼촌댁에서 베니 힌이 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방송을 하는데, 기적을 보이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람들의 병이 낫고 못 걷다가 걸었다고 합니다. 베니 힌이 등불같은 것을 가져오더니 광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3-40만원 정도 되는 등불을 홈쇼핑처럼 광고하는데, 자신이 기도를 해서 그 등불에 성령이 임재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베니 힌 목사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 판을 치는 이유는 기복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교회 안에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진지한 만남을 하진 못한채, 예수님의 자리가 부처가 되든 알라가 되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결과가 무엇인가요?
[24a]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의탁하다라는 것은 ‘믿는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종류의 믿음의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그러한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그 사람들이 수십 만명이 모인 교회를 이룹니다. 그런데, 많은 수가 모일수록 기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런 믿음이 아주 필요 없는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맺게 만드는 기초적인 믿음인 것입니다. 처음 예수와 관계를 맺을 때, 예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겠지라는 갈망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시작점이지,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믿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기적을 경험하고 싶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궁금증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와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입니다. 기복적인 믿음에 머물러있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4-15)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였는데, 사람들이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라고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단순히 자신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줄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두고 가십니다. 단순히 먹을 것을 주러 온 신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아직도 이렇게 추구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배가 채워지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으로 사람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이런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 채, 우리는 욕망 하나가 채워지면 다른 욕망이 생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기만 해도 욕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만족시켜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욕망은 근원에서 해결 받지 못하면, 지금 당장 이것만 있으면 되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 깊은 목마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와 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예수님을 호기심에 따라다녔던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제자라고 하는 것은 생업을 버리고 예수와 같이 되겠다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을 떠납니다. 기복적 믿음의 결과입니다.
앞으로 한국 기독교는 더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복적인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이 예수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핍되었을 때는 결핍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찾다가, 인격과 신앙이 자라며 예수를 진짜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결핍을 예수로 채우려고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많은 풍요가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과 관계 맺기 전에 더 이상 예수와 함께하지 않는 자리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발전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사람의 속에 더러움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24]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이 왜 사람들을 믿고 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셨나요? 사람들을 이미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 상대방을 다 안다면 결혼이 어렵습니다. 결혼해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결혼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를 오래하면 깨지는 것입니다. 적당한 시간까지 연애를 해야 결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첫사랑도 그렇습니다. 예전의 첫사랑을 돌아보며, 그 사람과 결혼했으면 어땠을까하지만, 깊이 알면 모든 관계가 똑같습니다.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지금의 배우자에게 만족을 못하고 다른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을 통해 이기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다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으셨는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5a]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는데,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명이었습니다. 무명이었다가 이름을 알리게 되면, 돈과 인기, 명예가 한꺼번에 찾아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는 것을 우리 모두 열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괜찮고 훌륭하고 멋진 사람으로 봐주기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증언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고 합니다.
[25b] …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왜냐면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마저도 자기 중심적 욕구에서 발현된 것임을 아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시는 가장 큰 더러움입니다. 이것이 관계를 깨트리는 가장 큰 독입니다. 부부관계나 부자관계, 어떤 관계나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 자신을 이용해 욕망을 이루고자 한다면, 그 관계는 깨어지게 됩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돕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이런 순수한 도움을 받으면 감동을 하게 됩니다.
제가 한 프로그램을 보는데, 시각장애인인데 판사가 되신 분이 나왔습니다. 군대에서 사고로 시력을 잃은 듯 하였습니다.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며, 대학을 복학하여 졸업하고 로스쿨을 마치고 판사까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되었기에, 집밖에도 나오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을 혼자 극복한 것이 아니라, 학교 친구들이 도와준 것입니다. 로스쿨에 가서도 친구들이 자신을 데리고 다니고, 수업 녹취해서 주었습니다. 이 판사 분이 정말 고마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이 진짜 도움을 받은 사람의 반응입니다.
하지만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해서 아내가 나를 돈벌이로 본 것을 안다면, 남편이 나를 성적 대상으로만 본 것을 안다면 이 관계는 깨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속에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대상으로만 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그들과 관계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요즘 아주 인기가 있는 가수가 있습니다. 싱어게인에서 1등을 하였고,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친구가 쓴 곡이 있는데 매우 공감을 하였습니다.
이승윤 [영웅수집가]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아마도 나의 영웅이야
어쩌면 저렇게도 올곧고 위대한 건지
끝까지 나는 따를 거야
다만 내가 원할 말만 영원히 하면 돼
걸음걸이도 한치도 어긋나지만 않으면 돼
나의 진열장에 놓을 영웅이야 손대지 마
이런 조금 바랜 흔적이 있잖아 부숴도 좋아
이것이 바로, 인생 내내 사람들이 영웅, 연예인, 심지어 그 자리에 목사, 예수를 올려놓고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내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말만 영원히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진열장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했지만 내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니 부숴도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생 내내 영웅을 찾는다는 곡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더럽고 추악한 욕망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요?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하나님께서 이 마음을 아시기에 이 마음을 따라 반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고쳐서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우리 안에서 잘려나가야 하고 사라져야 합니다. 왜냐면 이 마음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더러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사람들이 못 박았나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예수님이 갖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의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을 기도로 올려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다보면, 똑같은 기도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자세히 그 기도를 들여다보면 그 기도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투영한 기도일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나의 욕구를 이루고자 한 기도라면, 그를 십자가에 가져가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우리 인생 가운데 욕망이 좌절될 때마다, 그 욕망을 십자가에 가져가 못 박는 일을 자주할수록 욕망이 이루어져서 얻는 일시적 만족보다 훨씬 더 크고 풍요로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나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며, 말씀을 적용하며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욕망을 만족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없어도 바울 사도처럼 궁핍에도 처하고 부요에도 처할 줄 아는 자족함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자유의 자리로 나아가는 그 은혜, 우리가 예수와의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와 깊은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자신의 욕망을 돌아보며 그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