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3일 주일예배 설교문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놀라운 선물을 주시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그 상황을 3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유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풀어서 예수님의 이름이 점점 영향력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주목하게 되자, 예수님은 북쪽으로 옮겨가십니다. 이스라엘의 남쪽에는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지가 있고 북쪽에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이를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며, 요단강의 왼쪽 부분이 사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북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먼 우회로를 통과하는데, 사마리와 유대인들의 관계가 나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는 구약성경에서 북이스라엘이 살던 곳이었는데,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이방 민족을 사마리아에 살게 하여 사마리아의 대부분 사람들은 혼혈민족입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신앙을 받아드림과 동시에 이방신앙을 가져와 혼합신앙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성전이 필요하다고 하여, 게리심 산이라는 곳에 성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불태웠고 그로 인해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엔 엄청난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통하지 않고 멀리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영어로 하면 ‘it is nassesary’ 꼭 필요한 일입니다.
사마리아에서 있을 일의 배경을 5절과 6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성경에 나와 있는 여섯시는 지금의 12시 정오를 의미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오는 정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뜨거운 날씨입니다. 제가 오래 전, 성지순례를 갔었는데 정오에 여리고에 버스가 도착하였습니다. 버스 안에서는 뜨거운지 모르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한국의 90도 사우나 문을 연 느낌이었습니다. 맨살로 햇볕을 쪼이면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느낌이라 뛰어서 간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사람이 다닐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에 우물가에 도착하셨습니다. 우물가는 신랑이 신부를 찾는 장소로 자주 등장합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신부감으로 선택된 장소도 우물가였고 야곱이 라헬을 만난 장소도 우물가였고, 모세가 아내 십보라를 만난 곳도 우물가였습니다. 고대에는 여자들이 밖을 함부로 다닐 수 없었는데, 우물가에서는 유일하게 자유롭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3] 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창 24:13-14)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은 종이 많은 은금폐물을 가지고 이삭의 신부를 찾으러 갔습니다. 신붓감을 찾는 방법이 마땅하지 않아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대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20대 때 이 말씀을 읽으며, 배우자를 이렇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야 이 말씀이 배우자를 찾는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를 어떻게 만나게 하시는지에 대한 내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리브가’는 교회의 모형이며 ‘종’은 이삭으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신부를 찾는 이야기이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부를 어떻게 찾으시는지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고대나 현대나 여자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좋은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선물의 값어치만큼 그 사람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선물이 형편없으면 사랑의 크기를 크게 여길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선물은 선물을 주는 사람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종이 리브가를 만났을 때, 선물을 줍니다.
“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창 24:22)
물 한 번 먹였다고 금 귀걸이를 선물로 준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녀를 이삭의 신부감으로 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금을 지금의 무게로 환산하면 230g정도의 무게인데, 1800만원 정도 되는 금붙이입니다. 엄청난 선물을 통해 자신이 소개하는 신랑이 얼마나 부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신부를 찾아와 자신이 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부에게 어떤 선물을 주시나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vv.7-14
[7a]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
예수님과 그의 신부 혼인 이야기라고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처럼 고귀하신 분이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여인을 신붓감으로 찾을 수 있으신 것일까요? 이 여인은 혈연적으로는 혼혈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혼혈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문란하고 천박한 여인으로, 남편이 5명이었고 여섯 번째 남자랑 동거 중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찾기 힘든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왜 이렇게 결혼을 많이 한 것일까요? 남자를 통해 얻고자한 깊은 갈망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한 마을에 이런 여인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마을 전체는 이 여인이 골칫거리였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모든 관계가 깨어진 채 살아가는 비참하고 외로운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신붓감의 모형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 여인과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세상에서는 마귀처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관계적 아픔으로 인해 힘들어 합니다. 다른 사람을 질투하며 상처입고 좌절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으며, 갈망을 채우기 위해 중독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사마리아 여인과 닮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구제불능이더라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신랑이 되고자 하십니다.
[7b] …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아마도 예수님은 이 여인과 단둘이 대화하시고자 제자들을 동네에 보내셨던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반응하나요?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누군가 전염병에 걸려, 그 사람 전염병에 걸렸다고 피하듯 사마리아인들을 유대인들은 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지금 이 여인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생수이며, 이 생수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모르는 가장 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수는 우리의 근원적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인간의 영적 목마름을 채우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수뿐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은 우리의 욕망으로 인한 일들입니다. 불만족으로 고통하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욕망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도 욕구가 좌절되어서입니다.
인간들은 이 영적 갈망을 채우고자 쉽게 추구하는 것이 감각적 쾌락입니다. 다른 것으로도 갈망을 채울 수 있지만 다른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망을 채우고자 잘못된 식습관에 빠져들고 많은 사람들이 갈망을 채우고자 잘못된 미디어 습관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각을 채우고자 하는 노력은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경험합니다. 처음에는 너무 맛있지만 금방 한계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1970년에 흑백 텔레비전을 보면서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린이들에게 흑백 영상을 보여주면 보지 않을 것입니다. 더 강렬한 자극 없이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액션 영화라도 과거에 나온 영화는 시시해 보입니다. 더 자극적인 걸 추구하는 이유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강한 자극을 원할수록 더 깊은 중독에 빠지게 됩니다. 중독에 빠지면 점점 일상생활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삶에 영향이 미치게 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스마트폰도 중독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학교에서 제가 학생을 가르칠 때, 학생들이 졸고 있는데 흔들어도 깨지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밤에 게임을 하느라 잠을 자지 못한 아이들입니다. 침대에 2시 쯤 휴대폰을 들고 들어가 학교에 올 때까지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게임을 위해 휴대폰을 3개씩 가지고 다니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더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불행해집니다. 감각적 쾌락에 깊이 빠질수록 현실감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갈망의 중심은 우리 영혼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다른 것을 끊는다고 하여도 다른 것에 중독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근원적 문제입니다. 이 이유는 우리의 갈망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갈망이 감각적인 중독과 관계의 파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요? 끊임없이 인생 내내 한 인간이 완전하고 온전하다고 기대하여, 그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원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외로워합니다. 외로워서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으로 외로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것은 영적 갈망이 관계적으로 표출된 현상에 불가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채울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멋진 남자, 멋진 여자를 추구하며 관계를 맺어도 한계를 경험하는 순간에만 사람이 답이 아닌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요즘의 문제는 젊은 세대가 대면해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에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온라인에서 인기를 누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면 대화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강력한 기성세대는 알지 못하는 가상 세계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오큘러스라는 물건이 있는데, 평소에 쓰던 휴대폰을 오큘러스 기계를 사용하는 순간, 3d의 가상 현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폐해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가상 현실이 인간 관계를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가상 현실 산업은 포르노 산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공허감을 이용한 산업입니다. 우리의 자녀 세대는 이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 중고생들이 하루에 7시간 정도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하루종일 눈에 기계를 끼고 사는 사람들이 생길 것입니다. 마귀가 인간의 갈망을 이용해 영혼을 사로잡아 멸망으로 이끌려는 것입니다.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여자는 예수님께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이 여자가 만약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 여겼으면 대화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대화를 시도할 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이 여자가 알 수 있는 가장 큰 인물은 야곱입니다. 신기하게도 야곱의 우물이 지금까지도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3,000년 전에 뚫은 야곱의 우물이 아직도 물이 샘솟고 있는 것입니다. 사막에 놀라운 일을 했던 야곱을 이 여인이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직도 예수님이 자신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답입니다. 우리 인생이 시도하는 갈망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다 실패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 생각했던 것이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인생에서 전부라고 생각하며 달려갔는데, 얻어도 아무 것도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인생을 낭비하고 인생 가운데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위가 인생을 더 깊은 갈망으로 밀어 넣게 된 것입니다.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을 통해 생수의 풍요함을 맛본 자만 깊은 갈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생수를 맛보고 계신가요? 이 생수를 어떻게 맛볼 수 있는 것일까요?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깊은 갈망을 채울 생수의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새로운 갈망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질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이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갈망이 생겨납니다. 육신적 갈망은 여전히 존재하나 이를 뛰어넘는 갈망이 생겨납니다.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 싶은 갈망입니다. 예전에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갈망입니다. 예전에는 예배가 힘들고 지루하다고 생각되었는데,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갈망을 잠시 경험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멈춰있어서는 안 됩니다. 육신적 갈망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다가는 영적 갈망이 육신적 갈망에 의해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 갈망이 채워지는 경험을 하고 계신가요? 기도하셔야 합니다. 깊은 갈망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맛봄으로 육신적 갈망을 뛰어넘는 하늘의 만족을 경험하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보다 뛰어난 생수의 선물을 부으셔서, 우리의 갈망을 채우실 것입니다. 이런 만족과 기쁨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