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제가 예전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사랑이 감정적이며 강렬해서 매일 예수님 생각에 눈물을 흘렸고, 예수님을 직접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강렬했습니다. 그때, 자주 기도하며 환상으로라도 예수님을 한 번 보고 싶다는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보고 싶다는 기도도 많이 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미래에 혹시 타임머신이 발명된다면, 꼭 2000년 전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하니, 그들은 참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더 보다보니, 그 시절에 제가 태어났다면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만나기 원한 예수님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가 만들어낸 완전하고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며 저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오셨을 때, 초라하고 볼품이 없는 시골 총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19a] 그러므로 …
‘그러므로’는 바로 앞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시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맥락 가운데 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으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b]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이 행한 일이 하나님의 일과 같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대에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자녀가 물려받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수라고 하는 이유가 아버지가 목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의 모든 행동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나중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보고 그 일을 그대로 행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며, 인간과 다른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예수님께 다 보여주신 것일까요?
[20a]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
그냥 예수님에게 아들이니깐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특별히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 당시 안식일을 열심히 지킨 이유는 하나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정하시고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을 열심히 지킨다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깨트렸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말씀을 더하십니다.
[20b] …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한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무엇인가요?
1.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v.21
[21a]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죽은 자들을 살리진 않으셨습니다. 대신 구약 성경에서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엘리야가 살린 과부의 아들이 대표적입니다.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왕상 17:17, 22)
엘리야가 자신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도구를 사용하셨지만,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을 행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로 인해 더 놀라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21b] …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의 역사보다 예수님이 살려내시는 일이 왜 놀라운 일인가요? 영혼이 죽은 자들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가끔씩 해외 토픽에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치르고 몇일 후,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해외토픽에 나올 법한 일인데, 실제로 죽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짜 성경에 나오듯이 나사로처럼 썩어서 냄새가 나는 상황에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육신이 죽었다 살아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은 왜 더욱 놀라운 일일까요? 영혼이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육신만 다시 사는 사람은 결국 또 죽게 됩니다. 예수님이 살리셨던 나사로도 그 이후에 다시 육체적으로는 죽었습니다. 몇 십 년이 지나, 나이가 들어 죽었을 것입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한계에 도달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생을 얻은 영혼은 죽지 않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는 육적인 모습을 보시지 않습니다. 영적 입장으로 인간을 이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인간은 영적으로는 죽은 존재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숨을 쉬지 않는 육체적 죽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의 죽음은 영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요즘 딱 이런 모습을 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바로 좀비입니다. 대부분의 좀비 영화는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겉모양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정신 세계는 인간이 아닙니다. 몸만 살아 있는 죽은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비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좀비들을 죽입니다. 좀비를 죽이는 사람은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습이지만 안의 정신은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여 보면,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좀비와 같은 존재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람을 이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 안에 존재하여,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인간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능력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육체는 멀쩡한데,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이기심, 미움, 악으로 가득한 존재들을 보실 때,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존재가 살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이 죽은 자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육체적 죽음을 극복한 자가 놀라워보여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만 되살아날 수 있는 생명을 얻은 자를 보실 때 더 놀라운 일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영혼이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나셨나요? 이제는 우리 안에 이전 사람은 경험하지 못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이 죽었던 자가 살아나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영생의 약속, 예수님을 우리가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육체가 죽은 자를 살아나는 것보다 놀라운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큰 병에 걸렸다 낫게 되면, 엄청나게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죽었던 자가 살아난 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도 이것에 감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판단이 육신에만 머물러 있다면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소유하고도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믿음으로 살아갔던 믿음의 선진들은 부활의 능력으로 고난과 박해를 이겨내어 이 땅에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히 11:35)
초대교회의 상황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핍박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부활로 말미암아 고통 받던 인생을 끝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겠다는 믿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풀려나게 해주겠다는 박해를 받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받아들이고자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일본에는 한국보다 기독교가 일찍이 전파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을 통해 무역선이 오고가며 일본에 복음이 전파되었는데, 임진왜란도 더 전에 기독교 신자들이 일본 내에 있었고 한 지역 전체가 예수를 믿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한국을 침공한 장군 중의 한 명은 십자가를 깃발로 들고 침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중앙집권을 원했던 도쿠가와 막부에서 기독교를 핍박한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외국의 문물을 개인적으로 받아올까봐 개인이 배를 타고 나가 외국 사람과 접촉하면 사형을 시켰습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역의 사람들은 데려다가 신앙을 묻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죽였습니다. 한차례 엄청난 핍박이 지나가고 더 심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그림을 놓고 짓밟고 침을 밷는 자들만 살려주었습니다. 말로는 예수를 안 믿는다고 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짓밟는 것에는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수십 만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핍박 가운데도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극심한 박해의 상황을 묘사한 소설이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입니다.
어느 곳이나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믿음을 테스트하는 일이 존재합니다.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이렇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하고 안타까운 일일까요?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이 땅의 삶을 뛰어넘는 더 아름답고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 땅이 좋아지고 세상이 안전해 보인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 땅의 인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젊었을 때는 무엇인가 이 세상에 멋진 것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이 참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저의 인생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열망 없이,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더 잘 살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다면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주신 진짜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땅에 매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권태를 이기고 이 땅에서의 어려움으로부터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당하는 어려움도 부활의 생명의 능력으로 이겨내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은 무엇인가요?
2. 심판을 행하시는 일입니다. vv.22-23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하나님이 왜 직접 심판하시지 않으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무엇인지 판단하시기에 예수님이 심판권자가 되십니다. 18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반응이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었고, 그들은 예수님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심판을 예수님에 대한 반응으로 결정하시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때,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하나님을 상상하나요? 자신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줄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오시니깐,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이유는 자기의 의를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종교적 열심을 내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며 사랑해주실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의를 갖지 못하게 그들을 책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를 내세우기 원합니다. 영적으로 인간을 부끄러워졌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남으로 인간은 스스로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고, 잘나고 멋있어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의를 추구합니다. 종교적으로 안식일을 추구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외모가 출중하길 원하며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출중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실체가 폭로됨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듭니다. 학생들은 성적이 구체적으로 나오면서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서 조금 잘했다고 끝이 아니라, 경쟁이 끝이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받을 때 부끄러움을 감추고자 외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의를 쌓는 안식일을 건드리시자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힘 있는 분으로 오시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미워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흠모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겨우 30살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멋지고 준비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학력 없이 동네에서 목수를 하다가 오셨습니다. 어떤 왕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라, 동네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멋진 모습으로 상상할까요? 하나님이 가진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속 메시아 사상입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어떻게 다가오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의 승천까지 보려고 할 때, 예수님께 이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 1:6)
마지막 순간에 물어본 것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어 나라가 부강해지며, 경제적으로 풍요하며 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3년간 따라 다니며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야 변화됩니다. 로마는 더 강성해지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멸망한 상태입니다. 당시에 세계를 로마가 통치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강성한 로마 앞에서 제자들이 주눅 들지 않습니다. 용이 세상에 날 뛰고 세상을 통치하고 성도들을 죽일 때, 요한이 거기서 보았던 환상 속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다시 오셔서 용의 머리를 짓밟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임하실 것임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는 분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아직도 여전히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으로만 바라본다면,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의 문제와 상황, 고통을 겪어가며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사랑하고 의존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과 사랑으로 중심이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진짜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 눈에 힘이 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경제적 문제, 몸의 질병,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라면 예수님이 힘이 강한 분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욕심을 발견하고 자아가 깨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찬란한지를 배워나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예수님 앞에 심판의 길이 달라지게 됩니다. 여전히 나의 나라를 위해 나의 영광을 위해 예수를 이용하고자 한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 실망하게 될 것이며, 예수를 만나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심판을 통과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