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5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11장에는 나사로의 죽음과 또 살아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건은 그저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난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의 특별한 사건들 그리고 특별하지 않은 사건들도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자 기록된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15절에 그 목적이 적혀 있습니다.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은 것은 최악의 상황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믿음’을 가르쳐주시고자 했기 때문에 이 기회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나사로와 형제들에 대해 1절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나사로, 마리아, 마르다는 성경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특별히 마리아는 2절처럼 특별한 행동으로 성경에 계속 기록됩니다.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예수님과 이들의 친밀한 관계는 성경의 여러 구절에 의해 추측하건데 이들의 아버지 시몬이 예수님께 치료 받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절을 보시면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나병 환자는 사람들과 식사를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사람은 이전에 나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에 의해 치료받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편의상 여전히 ‘나병 환자 시몬’이라 불리는 것이지요. 그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마리아가 등장해 향유 옥합을 깨트립니다. 아버지가 불치병이던 문둥병에서 치유의 기적을 경험한 뒤 온 가족이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추할 수 있기에 오빠 나사로가 아프자 3절처럼 반응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누이들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하고, 본문도 예수님이 이들을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편애는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관계적으로 더 친밀했음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보다 친한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나사로는 병이 들었고, 예수님은 치료의 능력이 있으십니다. 당장 가서 나사로를 낫게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려고 하십니다. 4절에 나옵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모습, 본질,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하나님 같다고 여겼나요? 아닙니다. 시골 마을의 청년, 배우지도 못하고, 배경도 없고, 재력도 없는 볼품없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시구나’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모습과 능력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능력인가요?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과학이 발전해서 수천 킬로 떨어진 사람과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높은 빌딩을 몇 초 만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우주를 탐구하고 있지만, 그런 인간이 백 년, 천 년 후에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의 능력은 창조주만이 가지고 계신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썩어 문드러진 존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이고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왜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고자 하셨을까요? 제자들도 지금 예수님에 대해 오락가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기적을 보면 즉시는 믿지만 금방 잊어 버리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잘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데 또 인생을 살다 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돈이나, 사람이 있어야만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자들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살아나신 뒤 그들을 떠나시는 시간. 그 시간이 오기 전에 예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가르치셔서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사역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이 이 가족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5절에 이야기합니다.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특별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상반된 내용이 이어집니다.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지금, 걸어서 최소 삼사일은 걸리는 거리에 계십니다. 10장 40절을 보면
10: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지금 출발하셔도 늦는데, 왜 이틀을 더 지체하셨나요?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개입 안하시는 때가 많은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이 좌절되고 죽을 때 개입하십니다.
강렬히 원하는 것들이 이뤄지지 않을 때 우리는 슬프고 힘이 듭니다. 그러다 어떤 지점을 넘어가면 그 욕망과 생각이 깨어지고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내려놓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 심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때야 예수님이 7절처럼 말씀하십니다.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자 나사로가 죽은 것을 확인하신 뒤 ‘때가 되었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불신앙으로 반응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물가물합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썩을 정도로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고 자는 것처럼 누워 있는 아이였습니다.
지금은 이미 썩어 문드러지고, 구더기다 몸을 파먹고, 냄새가 나서 시체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나버린 상황. 하나님이 최악의 상황을 통해 이들에게 진정 믿음을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믿음을 발휘해야 될 때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고 가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불신앙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불신앙은 무엇인가요?
1. 세상보다 큰 하늘의 권세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vv.8-10
첫 번째로 세상보다 큰 하늘의 권세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자고 하시니까 8절에서 제자들이 반대합니다.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계속 말씀을 전하시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불똥이 자기들에게까지 튀어 죽음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10장 31절에 보시면,
10: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그 일이 진짜 벌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어려서 그러한 일을 자주 당했다면 인격이 깨어지고 영혼이 뒤틀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려서 경제적으로 불안하게 살아서 커서도 돈에 대한 집착이 커진다던지,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어른과 지내며 두려워하다 커서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다던지 하는 경우입니다.
인간이라면 두려움이라는 감정과 마주하며 살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어떤 강력한 힘에 대한 반응입니다. 만약 무서운 맹수를 만나면 두려워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일그러진 두려움이란 그 대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을 진짜 안다면, 그 분이 얼마나 강력하신지, 얼마나 공의로우신지,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신지 안다면,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벌어지게 됩니다.
제자들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바다에서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길래?’라고 놀랐지만 그것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하나씩 경헌한다면 믿음이 쑥쑥 성장할까요? 무언가를 눈으로 보고 확인해서 확신을 갖는 것은 성경이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적이고 내적인 것입니다.
경험이 우리의 영적 본질을 바꾸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상황보다 말씀으로 우리를 기르십니다. 말씀으로, 예수님이 온 세상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우리가 믿음의 반응으로 배우고 나갈 때, 외적으로 경험되는 상황보다 더 강력한 힘이 생기게 됩니다. 두려워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9절과 10절처럼 말씀하십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비유적 표현입니다. ‘내가 빛이니 나와 있을 때는 절대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밤이 오고 빛이 사라진 것처럼 느낄 때 그때는 걸려 넘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워합니다. 제 인생에도 많은 두려움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두려움이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제 영혼을 잠식시키고 무너뜨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들을 드러내시고 우리로 경험하게 하십니다. 두려움의 근거, 그 실체를 알아야. 우려가 하나님 앞에 그것들을 내려놓아 그것들이 죽임을 당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두려워하는 대상은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 미래에 영향을 미칠까봐 억지로 순종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할까 봐 억지로 맞추어 줍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 의지하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잠언 29장 25절이 무엇이라 이야기하나요.
잠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언의 많은 구절들은 생략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29장 25절도 생략법을 적용해 빠진 단어들을 집어넣으면 원래 이런 문장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여 (의지하면) 올무에 걸려 (망하거니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의지하면 (올무를 피해) 안전하리라
양 문장에 반복되는 단어들을 엇갈리게 빼어 문장을 압축하는 기법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면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권력을 의지하고, 그러다 올무에 걸리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를 하나님은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계신가요?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의 주인이시며 그분이 모든 것들을 다스리심을 인정하시나요? 미래가 불안하고 내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의지하고 계신가요? 그 믿음을 가지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불신앙은 무엇인가요?
2. 죽음보다 강한 생명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vv.11-16
두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불신앙은 무엇인가요? 죽음보다 강한 생명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가 죽은 것이 확실한 시간에 출발하시면서 왜 ‘잠들었다’고 이야기 하시나요? 예수님께는 죽은 자나 자는 자나 같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신, 흙덩어리에 생명을 주신 창조주이시기에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을 향해 여러 차례 ‘잔다’고 표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24절에도
마 9: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야이로의 딸은 물론 죽은 지 얼마 안 됐긴 했습니다만 사람들이 왜 비웃었나요? 죽은 걸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다 쿰 즉,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들을 눈으로 본다면 더 극적이겠지만 말씀에 이것을 기록하신 것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힘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영원히 죽은 자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고 은혜를 받는 것 이것이 사실 육체가 살아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일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조가 필요한 일입니다. 이는 인간의 논리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영적으로 죽어가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때도 믿음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라는 믿음으로 반응하실 때, ‘내가 다시 갔을 때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물으신 그 믿음을 여러분이 발휘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가를 목도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육체의 차원으로만 보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세상에서는 누군가 육체를 해하려고 하면 너무 무섭습니다. 예수님은 그 육체가 별거 아니라고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이니까요. ‘아파르’라고 하는 흙은 고급 토양이 아니라 먼지를 뜻하고 심지어 성경에서 때로는 쓰레기라고 번역됩니다. 인간의 구성 물질 자체가 썩 최고가 아닙니다. 그래서 약하고 구멍도 나고 수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연약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왜인가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 연약한 몸 안에 영원이란 것을 넣어 놓으시고, 이 육체는 사라지고 무너지고 망가져도, 그 영혼을 빚어 가십니다. 100년 후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는 벗고 영원한 곳에서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하도록 준비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1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사실 그들의 속마음입니다. 잠들었으면 나을 테니 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때 13절에서 성경이 뭐라고 해설을 하나요?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것이 영적 차원과 육적 차원의 차이입니다. 그제야 예수님이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b] …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죽었기 때문에 가셔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시며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까지 말씀하셨는데 가장 두려움이 많다는 도마가 16절에서 이야기합니다.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 반응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죽어도 예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이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앞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반대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또 얘기했다가 혼날까봐 ‘우리도 죽으로 가자’라고 말하고 지금 분위기 가라앉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광을 보여주셔야 하는데 자꾸 찬물을 끼얹는 상황처럼, 생명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불신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요. 언제인가요?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질 때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구원이 일어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내가 잘해서 그렇지. 내가 참아줬더니 되었지. 이것은 인간적 반응입니다. 아직 자아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데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발휘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이 발휘되면, 나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집니다.
부활의 능력,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에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 믿음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아직 자아가 다 죽지 못해서입니다. 내 능력을 믿었다가 낙심하고 좌절하고 화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하실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자포자기와는 다릅니다. 믿음의 반응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충만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반응할 수 있고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