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7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파괴하고 죽이면서도 죄책감이 없는 종류의 악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이코패스 혹은 흉악범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특별한 종류의 악인이 존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평범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악에 대해 알아내고자 애써왔고 특히 홀로코스트 등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악을 보며 모두 경악을 금치 못 했습니다. 1960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5년 뒤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잡혔습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아르헨티나 정부와 상의하지 않고 아이히만을 납치해 재판을 열었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람을 오백만 명 이상 죽였다고 자랑하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는 도대체 얼마나 악한지를 알아보고자 하였으나 그가 얻은 결론은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아주 보편적인 사조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무서운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와 다른 존재였기에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선함과 악함은 불변의 특징으로 개인이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향력 아래 있을 때 누군가는 악을 행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결국은 좌우하는 영향력은 무엇인가요?
1. 하나님의 뜻입니다. vv.18-22
그렇다면 인간의 결국을 좌우하는 영향력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1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18a]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이 13장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시는 맥락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처럼 서로 사랑할 때 복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17절에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무엇을 알고 행한다는 것인가요? 세상 사람들은 높아지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파괴하지만 하나님 백성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진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 제자들도 서로 낮아질 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의 복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인간이 낮아져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기중심성이라는 무서운 죄에서 벗어난 자만 지킬 수 있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 모두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제외된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제외되었나요? 18절 하반절을 보시면,
[18b] …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떡을 먹는 자’는 가장 친밀한 관계입니다. ‘발꿈치를 든다는 것’은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말이 어떤 사람을 뒷발로 차기 위해 발을 떼는 행위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들 추측됩니다. 말이 뒷발을 들었다 찰 때, 그 발에 맞는 사람은 엄청난 고통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처럼, 친한 관계였던 누군가가 상대를 파괴하고 고통하게 만드는 행위를 ‘발꿈치를 든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41편 9절에서 다윗이 한 말입니다.
시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다윗은 친했던 사람들에게 여러 번 배신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경험을 하게 되었나요? 하나님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가 누구이신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림으로 다윗의 인생을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다윗이 친구들에게 배신당해서 내뱉은 고백은, 앞으로 메시아도 똑같은 일을 당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모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이야기하시며 21절과 22절에 말씀하십니다.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고대에 랍비와 제자의 관계는 현대 학교의 선생과 학생의 관계와 사뭇 달랐습니다. 랍비를 섬기겠다는 결정은, 집도 직업도 버리고 그 스승을 따라다니며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며 스승이 말하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배워 그 분처럼 되겠다는, 인생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 가장 열심히 있고 적합한 사람 열두 명을 택하셨는데 그 중 한 명이 가룟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가 물론 처음부터 배신을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나라가 개혁되고 영광을 누리려는 다른 제자들과 비슷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인 가룟 유다가 결국 예수를 배신하고 죽음에 몰아넣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 배신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인가요? 그런데 왜 구약 성경에 예언이 되었나요?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시지만 이 세상이 벌어지는 대부분의 악은 인간 안에 있는 죄악의 결과입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단서가 요한복음 12장 6절에 나옵니다.
요 12:6 …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이 재정을 맡았다면 그는 계산이 빠르고 꼼꼼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사용해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이란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욕심이 커지고 결국 돈뿐 아니라 사람까지 이용하고 버리게 된 것입니다.
물질은 사용하다 나의 필요에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버리고 새로운 것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의 문제는 사람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내 욕심을 위해 이용하고, 사람마저 그렇게 이용하려던 가룟 유다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의 전형적인 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사용하십니다. 잠언 16장 4절입니다.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악들을 경험하며 낙심하고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통해 팔리셨던 것, 이것이 한 사람의 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선을 이루시는 도구로 악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과 세계를 향한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악까지도 사용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인생 가운데 악을 경험합니다. 인생을 파괴하는 것 같은 고통도 경험하기도 합니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룟 유다의 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인도해 우리의 구원자로 삼으셨듯이, 하나님이 백성들의 고통도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시키시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다른 제자들과 다른 반응을 했는지 그 이유가 20절에 나옵니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봤으면 하늘의 하나님을 본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들었으면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갖고 있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강하고 위엄이 있고 놀라운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나요? 구약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6절, 18절입니다.
출 19:16, 18 [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하나님이 남산에 한 번 이렇게 임하신다면 교회의 성도들이 아마 열 배는 늘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하나님은 이렇게 임하시지 않을 듯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임하시나요? 하나님이 어떻게 오셨는지 이사야 53장 2절은 이야기합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이 이렇게 오셨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처럼 자기 욕심이 가득한 자들은 결국 배신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믿고 계신가요? 여러분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높여주는 분을 기대하고 있다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될 때, 여러분도 가룟 유다처럼 낙심하며 그를 배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눈에 미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내 인생의 악을 해결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아시면서도 여전히 허용하셨던 것과 같은 이유로 상황을 두고 보십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그를 뽑지 않으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그를 열 두 제자로 들이셨습니다.
사람이라면 나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나 상황을 피하고자 애쓰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받아들이시고 오히려 더 큰 선을 이루는데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서도 똑같은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한다면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던 어떤 상황이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이 과정을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저히 용납이 불가능 한 자까지도 받아들이셨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무엇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나요? 19절입니다.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친구의 배신을 통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뒤 제자들이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그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미리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호하게 이야기하십니다. 제자들이 배신자를 미리 제하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반드시 악인을 만납니다. 객관적으로 악인이 아닌데 나에게만 악인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만 선택적 악인입니다. 평소에는 문제 될 일이 아닌데, 나랑 특별한 관계나 상황이 맞물려 있어서 계속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해도 왜 그 악인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뜻인가요? 요한복음 6장 39절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도 어떤 상황에 있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개입이 없었다면 죄인으로 악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내가 은혜로 인해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실 줄 믿습니다.
인간의 결국은 좌우하는 영향력은 무엇인가요?
2. 마귀의 개입입니다. vv.23-30
두 번째로 인간의 결국을 좌우하는 영향력은 무엇인가요? 마귀의 개입입니다. 23절부터 25절 말씀입니다.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찬을 할 때는 누워서 밥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서 유래된 풍습으로, 왼쪽 팔로 머리를 기대거나 베개를 놓고, 식탁을 가운데 두고 떡을 오른손으로 찍어 먹었습니다. 왼쪽으로 누우면 위가 더 늘어져서 앉아서 먹을 때보다 더 많은 양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안된 자세이지요.
보통 세 사람 정도씩 한 소파에 누우니까, 예수님 앞에 아마 요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멀리 있는 베드로의 손짓에 요한이 묻자, 예수님이 2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얼핏 읽으면 명확하게 유다라고 말씀하신 것 같지만 이것이 약간 모호합니다. 식사라고 해도 내용물이 별로 없는 납작한 떡을 와인이나 시럽 등에 찍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은 주인이나 제일 높은 사람이 일행들에게 떡을 돌려 나눠줌으로 우리는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 뿐 아니라 모두에게 떡을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인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과 함께 떡을 떼어 주시자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27절입니다.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성경에서 사탄이 들어갔다는 표현은 여기 한 번 밖에 안 나옵니다. 진짜 사탄이 사람 속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이 가룟 유다가 사탄의 완벽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사람을 온전히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일이 벌어졌나요. 요한복음 13장 2절입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처음에는 생각만 넣습니다. 지난 본문에서 보셨듯이 이미 마음에 예수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 사탄이 더 일하게 됩니다. 이렇게 들어간 마음이 그 한 존재를 요동시키며 욕망과 일치할 때 결국 그는 마귀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다양한 상처, 분노, 죄악 가운데 마귀적 개입으로 인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도 하게 됩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예가 가인입니다. 창세기 4장 6절과 7절입니다.
창 4:6-7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왜 화를 냈나요?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입니다.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기 제물은 받지 않으셔서입니다. 만약 가인이 하나님이 받으시든 아니든 관계없었다면 화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언제나 인정받고 싶었고 그 욕구가 무너지자 분노로 가득 찹니다.
물론 화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화가 납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일은 너무 자주 생기기 때문입니다. 화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화난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들어오며 그것에 지배당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이것을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엎드려’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사자가 사슴을 잡기 위해서 ‘웅크려 있다’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맹수는 먹잇감을 서 있다 공격하지 않습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 몸을 굽혔다가 뛰어듭니다. 죄가 가인을 사로잡기 위해 문 앞에서 웅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인가요? 마음의 문입니다. 인간은 이 마음의 문이 깨어질 때 영적인 힘에 사로잡혀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마귀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경고하셨는데도 자기 분노에 못 이겨 마음의 문을 스스로 열어 버립니다.
그리고 문이 열린 상황 가운데 동생을 들로 불러 돌로 쳐 죽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인간은 독립적이고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혼자 잘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지만 영적으로 보면 죄로 인해 마귀의 노예가 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 모습에 대해 요한일서 3장 12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인간은 어디에 속했는가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간은 스스로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받아들여 예수에게 속하면 마귀의 지배와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지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마귀에게 속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저주받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시고 ‘네가 하려는 일을 하라’고 말씀 하셨더니 제자들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하나님이 이들이 영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인간적 생각으로 29절에서 뭐라고 생각했나요?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영적 차원에서 지금 가룟 유다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마귀가 시키는 대로 창조주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를 팔아버리게 되었는데 인간적 눈으로는 물건을 사라는 뜻인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결국은 어떻게 되나요? 30절입니다.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에서 낮과 밤, 빛과 어둠은 계속 대조됩니다. 빛은 하나님의 은혜, 생명, 긍휼을 받은 상태입니다. 예수가 계시는 곳이 빛이 있는 낮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나갔더니 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가 그 인생에서 사라지며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어둠에 속한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선하게 태어나서 노력했더니 선하게 살고, 악하게 태어나서 악한 일만 하다 악하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존재인 인간은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쩌면 마귀의 영향에 사로잡혀 가룟 유다처럼 끝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길을 주신 것입니다. 그 새 길은 로마서 8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자유와 해방이 우리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고 노력해서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처럼 노예가 될 자들이라도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은혜를 받는다면, 인생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십니다. 이를 받아들여 모든 어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은혜가 여러분 인생에 충만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