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었던 적이 있으신가요? 제가 하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경우들을 돌이켜 보니 첫 번째는 고난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 없을 때였고 또 다른 경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 가득 차고 넘칠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의 시기는 늘 유사했습니다. 고난이 너무 심할 때 평소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다 보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커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참 좋은 마음 같지만 사실 이 마음이 든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지 않으니까, 아픔에서 진짜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지 증거를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진짜 존재하는 분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 제자가 있습니다. 8절입니다.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이며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빌립 뿐 아니라 제자들은 그 말을 온전히 믿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믿음이 시원찮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헌신과 사랑으로, 생업도 버렸고,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수 있는 위험도 감수하며 예수님을 3년이나 쫓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죽으시고 떠나신다면 이 분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불신이 든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9절에서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은 3년간 매일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이곳저곳을 다니고, 같이 밥 먹고, 말씀을 나누고, 생활하고,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본 제자들에게 아직도 ‘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는 이해하지 못하는가라고 질문하신 뒤 계속해서 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육체적으로는 이 땅에 예수님 한 분이 오셨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한 분처럼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셨기에 11절에 말씀하십니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저런 일을 할 수 없을 테니,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계셔서 그 일들을 행하셨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12절입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사실 이 구절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말씀을 오해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과장하고 속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은 자를 살리기는커녕 기도로 감기조차 낫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대체 예수님보다 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말라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적 중 요한이 일곱 가지 기적을 기록한 목적은 명확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도는 그를 믿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이 무엇이었나요?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단지 맛있는 음료를 주는 분이어서가 아닙니다. 결혼식은 인생의 기쁨이 집약된 자리이며, 기쁨을 더해 줄 포도주가 결핍되자 예수님은 이를 채워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기쁨을 잃어버리고 결핍되어 살아가는 죄인들에게, 예수님의 피로 기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죽게 된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은 직접 가서 손을 얹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치료하심으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온전히 하시는, 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런데 38년의 병을 고쳐준 분을 바로 고발하는 이 병자는, 마음에 원망과 불평과 미움과 열등감이 가득한 죄인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와 죄인까지도 온전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십니다.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이, 생명의 공급자가 되심으로 인생들의 결핍을 채우고, 넘치고 충만하게 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성경에서 물은 혼돈과 무질서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계획한 대로 일이 되지 않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매여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혼돈과 무질서를 밟고 오심으로 온전한 질서를 만드실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장님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영광스러운 하늘의 아름다운 빛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어둠에 매인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물질적 세계를 넘어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볼 자들로 만드실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죽어 썩어서 냄새 나는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예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위의 모든 기적들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핍으로 슬픈 자들에게 기쁨을 주시고, 어그러진 자들을 온전하게 만드시고, 무질서 가운데 고통 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어둠의 매인 자들을 보게 하시고, 죽어 썩은 자들을 다시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시는 것,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찬란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닌 우리에게는 어떠한 일이 맡겨져 있나요? 우리를 통해,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드러나시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더 큰’ 일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갈릴리 근방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여러 기적을 행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열 두 제자를 양육하신 것이 사역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지역도, 시간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역을 누군가가 계속 해 왔기 때문에 이천년 뒤, 갈릴리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들까지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준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가 13절은 이야기합니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셨던 일이며 우리에게 맡겨진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인생에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단계가 있어서 처음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믿음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가집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믿음은, 다른 존재에 대한 의존과 사랑을 다 없애고, 예수님에게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돈, 인맥, 능력, 운을 자꾸 의지해 보려고 하기에 ‘예수님만 믿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잘 드러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14절에 있습니다.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마음대로 기도해놓고 마무리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주문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나의 전 존재가 예수님의 뜻과 마음과 삶과 본질과 일치하게 되어, 이것이 내 기도인지 예수님의 기도인지 한 가지처럼 보일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뜻을 바꾸어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기도의 과정을 통해 기도하는 자를 바꾸어 내십니다. 그래서 잘못된 기도조차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기도라도 일단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영혼 안에 있던 이기적인 본심이 드러나고,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신실하심과 나를 향한 더 선하고 온전한 뜻을 가지고 계심을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온전히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온전히 기도하면 모든 기도가 다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온전히 예수를 믿고 모든 기도가 예수님의 뜻과 완전히 같은 상태를 성경은 또한 ‘성령 충만’이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했던 경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이런 모양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강력하게 오셔서 우리를 충만하게 다스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과 45절입니다.
행 2:44-45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왜 물질을 나누는 일이 가장 먼저 일어났나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예수님 대신 가장 온전하게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님만 믿으니까 더 이상 내가 물질을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던 본질이 바뀌니까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공동생활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하셔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시는 이 놀라운 은혜가 나타나면 그제야 이런 사랑이 나타난다는 그림입니다. 두 번째 나타나는 모습은 사도행전 2장 46절과 47절에 있습니다.
행 2:46-47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배가 회복됩니다. 교제가 회복됩니다. 함께 떡을 떼고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즉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부분적으로 사랑하며 반쪽짜리가 됩니다.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시면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이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신 우리를 통해 보여주시고 자는 그 영광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없습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이 땅을 사는 것입니다. 또 이것과 함께 한 가지를 더 요구하십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부터 42절입니다.
행 5:41-42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왜 이들은 핍박 속에서도 예수를 전했나요? 그 분이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덧붙여, 누군가 싫어하고 심지어는 손해가 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 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도 이것을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나를 도와주기를 원할 뿐,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처럼 사실 수 있나요? 핍박받고, 희생하고,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버릴 수 있으신가요?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은 세상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예수를 본받은 것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초대 교회에 복음 전파를 위해 기적이 있긴 했지만 바울이 말한 본질은, 이 세상을 의존하지 않고 예수만을 의존하며 살았던 태도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 삶과 입술을 통해 예수처럼 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이심을 전파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사도행전 1장 8절에 약속을 주셨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더 큰 일입니다. 성령을 주셔서 우리가 예수를 온전히 믿으며, 하나님만 예배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고 내 입을 열어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라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더 큰 일입니다. 왜 이 일을 맡기셨나요? 바로 구약 하박국 2장 14절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합 2: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누가 인정하나요? 세상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영광을 인정하는 일은 오직, 예수로 인해 결핍이 기쁨으로 채워진 자, 예수로 인해 영이 치유된 자, 예수로 인해 38년 비참한 인생에서 구원받은 자, 예수로 인해 영적 허기가 채워진 자, 예수로 인해 혼돈과 무질서에서 구원받은 자, 예수로 인해 눈이 떠진 자, 예수로 인해 썩어 죽었다가 생명을 얻은 자, 이들이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심으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