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밤에 하셨던 다락방 강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강해의 마지막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성육신,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승천. 예수님의 삶과 사역 전체를 이 한 절에 담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30절 상반절에서
[30a]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
그들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시며, 아무도 주님께 무엇인가 알고자 질문할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들어야 할 모든 것을 충분히 들었기에, 더 이상 궁금한 사항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30절 하반절에서 고백합니다.
[30b] …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남들보다 탁월한 어떤 분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곧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31절에서 물으십니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다락방 강화의 목적이 바로 이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야 믿는구나’하고 안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왜 믿어야 하나요?
1.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vv.25-27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왜 믿어야 하나요? 첫 번째로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25a]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
예수님이 많은 말씀을 비유로 전하셨습니다. 비유는 이 땅의 상황을 통해 영적 진리를 전달한 한 가지 방식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 그리고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상적인 단어들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를 모르면 이 말씀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6절에서
10: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3장 13절입니다.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영적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 하게 하심으로 이것이 결국 그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공기놀이를 했다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예수님의 진리가 비유로 주어졌지만 그들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비유의 참 의미를 이해한 자들은 예수님이 알고 믿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비유로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5절 하반절입니다.
[25b] …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아버지에 대한 것’은 영적 진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면’ 비유가 필요 없는 이유는 성령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 문제를 십자가로 해결하시고 성령이 오시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들이 진리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이제 비유로 말씀하시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도 예수님은 다락방 강해에서 여러 번 하셨습니다. 14장 26절을 보시면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이자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미래를 궁금해 하기에 이를 이용해 남을 속이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치실 ‘모든 것’은 개개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의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시키시며,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떠한 어려움보다 크시기에 죄와 마귀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넉넉히 지키고 보호하실 것임을 성령이 이야기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알게 될 것이 14장 7절에 나옵니다.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 주셔야 우리가 알게 되나요? 인간은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신을 믿지만, 기독교의 하나님, 이슬람의 알라 등 올라가는 길이 다를 뿐 정상에는 다 같은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이 다른 신들과 다른 점은 바로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기대하듯 슈퍼맨처럼 악인들을 짓밟고 이 땅에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이 임하지 않은 자들은 예수를 진짜 하나님으로 믿기에 꺼려지는 것입니다. 기왕 믿는다면 강력한 능력을 보이고, 나를 높여 줄 무언가를 믿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볼품없는 분을 진짜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26절입니다.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하나님께 직접 간구할 수 있게 됩니다. 조건은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자격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셨던 것들을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에 절처럼 꾸민 건물에 엄청나게 큰 수능 백일기도 플래카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어느 교회에도 똑같은 플래카드가 붙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간구하셨던 내용일까요? 불교의 간구와 기독교의 간구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일까요?
여러분, 어떤 사람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나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기도를 하셨나요?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무시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십자가를 넉넉히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즉 사랑을 위한 삶을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라면 우리 또한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기 위해 우리는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 욕망을 위해 내 이름으로 하는 기도에는 하나님은 절대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자신의 기준에 합당한 분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처럼 기도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23]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면 사람들이 무시해도 상관없게 됩니다. 누군가 우리를 무시할 때 화가 나고 힘든 이유는 우리 또한 세상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공기놀이를 못한다고 누가 무시해도 그것은 저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평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생각하신 방식입니다. 우리도 원하는 욕망이 채워진다고 해도 그런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진짜 기쁨이 충만하기 위한 기도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병자를 치료하거나 물 위를 걷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자 행하신 것입니다. 따라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인가요? 요한복음에서 계속 말씀하신 예수님의 유일한 계명,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 싫은 사람까지도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성을 벗어나 우리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길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이 27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27a]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나약하고, 정치적 변혁도 가져오지 못하고, 죽는다는 말을 하는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았고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가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27b]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실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일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마귀는 ‘네가 더 부자가 되면, 권력을 더 가지면, 좋은 차를 타면, 성공하면’이라는 조건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속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회복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사랑입니다. 세상의 거짓말을 이겨내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싶다고 간구하는 자들을 예수님과 같은 자들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이러한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왜 믿어야 하나요?
2. 환난 가운데 평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vv.32-33
두 번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왜 믿어야 하나요. 환난 가운데 평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곧 환란이 다가옵니다. 31절 상반절입니다.
[32a]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
왜 제자들이 흩어지고 예수님이 혼자 남게 되나요? 제자들이 지금 믿음으로 고백한 것 같지만 세상의 강력한 힘 앞에서 그들은 두려워 도망갈 것입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으면 군병들이 도착하고,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은 세상의 힘 앞에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우리도 많은 계획을 세웁니다. 운동하고 살을 빼겠다는 가벼운 계획 말고도 훌륭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해 다짐을 하지만 변하지 않는 자신에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영적 본질이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모두 세상이 두렵고 또 세상을 의지하기 때문에 세상의 실체를 마주하면 제자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으로 결심의 영역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적 고백이 아닌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이며 성령으로 인해 우리 안에 눈에 보이는 세상을 뛰어 넘을 때 결심으로는 불가능했던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물론 한 번 고백했다고 가능한 것은 아니고, 인생을 통해 성장과 변화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도망 갈 것을 아셨지만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32절 하반절을 보시면
[32b] …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우리는 인생 내내 많은 고백을 하지만 늘 실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래 우리에게 온전한 충성과 헌신과 완전함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감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근원적 불완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믿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기에 우리 때문에 실망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세세하게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33절 상반절에 나와 있습니다.
[33a]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평안은 아무 일도 안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힘이 질서를 유지할 때 주어집니다. 평화를 위해 모든 군대를 없애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평화가 아니라 침략과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더 강력한 힘이 약자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이 세상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평화를 누릴 유일한 길은 온 세상을 통치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안을 벗어나고자 애를 쓰지만 그러나 우리는 혼란을 야기하는 무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무질서와 혼돈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33절 하반절을 보시면
[33b]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서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이 얘기하는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귀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그 영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 가운데 환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환란으로 인해 내가 기대하는 대로 세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나를 두렵게 하고,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살 수 없게 하는 그런 영향력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잘 견고하게 만들면 될 거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준비를 한다 해도,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은 죄와 마귀와 사망이기에 예수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습니다. 예수만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군병 몇 명에게 잡혀 가셨고, 세상 법정에서 패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어떻게 이기셨다는 것인가요? 아마 제자들도 이것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어떤 세상인가요? 십자가로 죄를 정복하셨고, 십자가로 마귀의 머리를 깨트리셨고, 십자가로 사망을 무너뜨리셔서, 인간을 근원적으로 불안케 하는 죄와 마귀와 사망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아직도 죄와 마귀와 사망 가운데 매여 있는 자들은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해결하셨다는 믿음,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마귀를 물리치셨다는 믿음, 우리가 죽어도 괜찮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 누리는 것이 평안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을 경험하고는 평안이 무엇인가를 사도행전의 사역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두려워 떨며 도망가던 자들이 관리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를 선포합니다. 이는 단번에 이룬 것이 아니고 수없는 실패를 통해 믿음의 자리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들도 사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빠진 가장 극적인 상황은 이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우를 당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 폭풍우가 일자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하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예수님이 폭풍우를 잠잠케 하신 후 그들의 반응이 마태복음 8장 26과 27절에 있습니다.
마 8:26-27 [26] 예수께서 …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것들을 경험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수준으로는 마귀와 죽음과 죄가 만들어내는 공포와 혼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번 더 폭풍 속으로 이들을 데려가십니다. 이번에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심한 폭풍을 지나고 있었고 예수님이 바다를 걸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이 두 번째 폭풍우를 만나고 이들이 뭐라고 고백하나요? 마태복음 14장 32절과 33절입니다.
마 14:32-33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첫 번째에는 ‘이 분 누구야?’ 하고 질문했지만 두 번째에 예수님이 말씀의 선포도 없이, 예수님이 바다를 밟으시자 바람이 멎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이들에게 서서히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성경에는 지면상 두 번의 폭풍만 나오지만 우리는 수없는 폭풍우를 지나갑니다.
폭풍우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만 통과시켜 주세요, 해결해 주세요, 하고 잘못 기도합니다. 빨리 지나가는 것이 폭풍의 목적이 아닙니다. 폭풍을 지나며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진짜 두렵게 하는 근원적인 본질에서 자유를 얻어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드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다 폭풍우를 지나갑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계신 것 같은 순간도 있겠지만 신앙이 자랄수록 오히려 예수님이 가까지 계시지 않은 때가 옵니다. 그 때 우리가 가져야 될 믿음이 무엇인가요? 내가 예전보다 성장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치시고자 인도하셨다는 것, 근원적인 두려움에 매여 살아가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이기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모든 폭풍우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