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3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기도는, 말씀과 함께,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두 요소입니다. 한 사람의 영적 성장은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삶의 지표로 삼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도와 말씀 중 배우고 행하기 더 어려운 것은 기도입니다.
첫 번째로 기도는 도움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기도에 대한 책을 읽는다 해도 결국 개인이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형체가 없어서 어렵습니다. 성경을 100번 통독했다는 것은 수치로서 드러나지만 기도는 많이 해도 그에 비례하는 결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비일상적인 행위이기에 어렵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도 초, 중, 고등 교육은 받아야 하지만, 기도는 아마 평생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만큼 특별한 행위이기에 기도를 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말씀의 수준만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얼마나 묵상하고 있는가에 따라 기도가 달라집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기도가 길게 기록된 이유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지를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심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 6절부터 19절까지는 제자들, 마지막으로 20절부터 26절까지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간구할지에 대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1절부터 5절 말씀을 통해 기도의 목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1절 상반절입니다.
[1a]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
“이 말씀을 하시고”는 13장부터 16장에 제자들에게 하신 다락방 강화를 의미합니다. 즉 17장의 기도가 맥락 없는 기도가 아닌, 13장부터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에서의 ‘때’는 항상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구원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또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입니다. 1절 하반절을 보시면
[1b] …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사람을 매달면 팔이 양쪽으로 벌려져서 폐가 압박이 되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숨이 차면 팔의 팔목에 박힌 못을 의지해 몸을 위로 올립니다. 그러다 또 고통으로 다시 내려가게 되고 고통스럽게 그 일을 반복하다가 힘이 빠져서 질식사하게 되는 사형제도입니다. 게다 발가벗었고 팔과 다리로 몸을 가릴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예수님은 이것이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면 하나님 또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자리가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말하는 멋지고, 성공하고, 1등하는 개념으로는 이것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광이란 어떤 존재의 본질의 능력이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원석의 상태가 아니라, 가공 후 많은 면들이 생겨서, 깎아진 면마다 빛이 반사될 때입니다. 즉 다이아몬드가 가진 본질이 가공을 통해 자체의 능력을 발휘하게 됐을 때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어떤 본질인가요?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와 인자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지하고 전능한 분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그 분의 모습 즉 사랑이 많으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가장 놀라운 영광을 드러내셨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꼭 십자가를 통과하셨어야 하나요? 바로 영광을 잃어버린 인간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외적으로 눈코입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상이 닮았다는 것일까요? 바로 인간 안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오래 참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남을 대할 때 마치 하나님이 다른 존재에 반응하시는 대로 사랑과 긍휼과 은혜로 반응하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모습은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만나는 창세기 2장 22절과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창 2:22-23 [22]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어떤 존재를 처음 봤는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반응합니다. 내 몸에 많은 뼈가 있고 많은 살이 있는데 그 중 가장 귀한 부분과 같은 것이 당신이라는 고백입니다. 어떤 존재가 최고라고 생각할 때 따라오는 감정이 사랑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최고의 존재라고 반응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긍휼과 온전함으로 만족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를 나의 유익을 위한 도구가 아닌 그 존재 자체를 최고로 여기며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금방 문제가 생깁니다. 아담이 한 번 이 반응을 한 뒤에 죄가 찾아옵니다. 창세기 3장 5절입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자 관계가 파괴됩니다. 하나님의 가치로 받아들여야 그 대상을 최고로 여길 수 있는데 이제는 어떤 대상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의 여부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죄악의 시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물질을 이용해 나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 나의 욕망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 찾아온 인간의 모습이 바로 수치입니다. 창세기 3장 7절을 보시면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인간이 하나님이 만드신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게 되자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둘 밖에 없었는데 왜 문득 자신들이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일까요? 바로 다른 짐승들과 자기를 비교한 것입니다.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수치가 시작됩니다. 다른 존재는 모두 털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수치를 가릴 털이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완벽한 환경 가운데 아무것도 입지 않아도 영광스러웠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모습이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인간을 영광스럽게 감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변화산의 예수님이 빛을 뿜어내는 옷을 입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셨듯이 하나님의 형상이 영광을 뿜어내며 아담을 빛이 나는 존재로 만드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수치이고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한 인간은 자기가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 내가 모든 것을 남과 비교하니까 늘 모자란 것이 보입니다. 그것을 감추고자 또 명품, 화장, 시계, 자동차로 치장합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자기를 아름답게 만들며 세상의 힘과 외모와 남들이 영광스럽다고 칭찬한 것을 붙들면 어떤 결말이 나는지 성경은 압살롬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4장 25절입니다.
삼하 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다는 칭찬은 성경에서 압살롬이 유일합니다. 그러나 이 극적인 칭찬은 바로 압살롬의 외적인 아름다움과 대조되는 내면의 추악함을 대조시키는 장치입니다. 사무엘하 13장에서 압살롬은 자기 형 암논을 죽이는 사건이 있습니다. 우연히 화나서 죽인 것이 아니라 몇 년 동안 계획합니다. 계획적 살인은 악질적인 것이라 형량이 높습니다. 게다가 15장에서는 아버지조차 죽이려고 합니다. 사실 형을 죽인 것도 자기가 왕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고, 이제 걸림돌 중 마지막 남은 아버지를 죽여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너무 아름다웠고, 왕의 아들이었고, 사람들이 마음을 얻는 말에 능한 자였습니다. 이 모든 걸 가지고도 마지막 남은 최고의 높은 자리를 쟁취하고자 무자비해진 것입니다. 압살롬에게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구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 압살롬의 결국은 사무엘하 18장 9절에 나옵니다.
삼하 18:9 …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압살롬이 자랑하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려서 매달리게 됩니다. 무게가 2kg가 될 때까지 붙잡던 그 영광과 화려함의 상징인 머리카락이 대롱대롱 나무에 걸렸고 압살롬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을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가요? 신명기 21장 23절입니다.
신 21:23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가 저주받은 존재임을 보여주고자 일부러 이런 죽음을 연출하신 것입니다. 압살롬은 악한 인간이었습니다. 왕자로 태어나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하나님에게 저주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옛날에 살았던 한 나쁜 인간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해 왕이 되고자 한 것처럼,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반역이 저주받는 행위이기에 우리가 다 압살롬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