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8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미국 50개의 주 중 서른 다섯 개의 주에서는 아직도 사형제도가 실행되고 있습니다. 교수형, 총살형, 전기의자형, 독극물형과 같은 사형제도 중 특징적인 것은, 아무리 죽어 마땅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최대한 고통을 주지 않는 방법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교수형은 목을 매는 것인데,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하면 기절을 한 뒤 생명을 잃는다고 합니다. 총살형은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전기의자형도 몇 만 볼트의 전기를 갑자기 흘려보내어 심장을 파열시켜 죽이는 것이고, 독극물형도 먼저 수면제를 주사하여 의식을 잃게 한 뒤 독을 주사한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이 참혹한 사형제도가 바로 십자가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일까요?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인가요?
1. 인간의 모든 고통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vv.28-30
첫 번째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8절 말씀입니다.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이 목마르신 것은 전날 밤부터 계속된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밤에 끌려가신 뒤 이곳 저곳에서 심문을 받으셨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당시 로마인의 채찍은, 가죽을 여러 갈래로 쪼갠 끝에 동물의 뼈 등을 심어, 한 번 맞으면 온몸의 살점이 다 떨어져나가고, 심한 경우 죽을 수도 있는 무기였습니다. 또한 가시면류관으로 머리에 상처가 나고 피가 흐르셨을 것입니다.
많은 그림들처럼 사람의 손바닥에 못을 박는다면 몸의 무게로 인해 살이 찢어져 버릴 것입니다. 실제 사형수들은 손목의 두꺼운 뼈 사이에 대못이 박히는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힘을 쓰다 그 고통으로 인해 목마름을 느끼신 것입니다. 시편 22편입니다.
시 22:14-15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편 22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앞으로 십자가의 예수가 느낄 고통을 다윗이 맛보도록 하심으로 이 글을 쓰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육체적 고통을 심하게 당하시고 그 결과로 목마르셨다고 성경에 기록하는 것일까요? 목마름의 원인이 단순히 육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모든 영적 목마름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십자가의 고통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죄가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의 영적 목마름은 끝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도 육신적으로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적 고통보다 더 인간을 고통하게 하는 것은 영혼 안에서 솟아나오는 영적 목마름입니다. 목마름은 다른 말로 욕망이며 욕망의 근원은 죄입니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악한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허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는 인간에게 생명이 단절되자 영혼의 목마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고통은 이 영적 목마름에서 시작됩니다. 고통의 원인을 따져보면 결국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입니다. 무엇이 없을 때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원하던 것을 얻어도 궁극적 행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목마름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남편이라는 대상을 갈구했듯 모든 사람은 다양하게 목마름을 해갈을 대상을 찾습니다. 사람에 따라 쾌락, 돈, 성공, 안정 등 그 대상은 다르지만 그 결국은 늘 같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무엇을 보여주나요?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지만 결국 다섯 번 이혼하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요한복음 4장 14절입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을 얻기 전에는 목마름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 생수는 어떻게 얻을 수 있나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그 고통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른만 되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있으면, 우리는 늘 불만의 이유를 찾아보지만 목마름은 영적이기에 절대 스스로 해갈할 수 없습니다. 결국 주변 사람을 원망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자기를 절망하는 삶이 바로 저주입니다. 성경 이야기하는 저주는 앞으로 벌어질 무서운 일이 아닙니다. 생명 없는 상태, 이 땅에서 스스로는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상태를 저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나요?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이 고통하고 목마르신 이유가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저주라는 심판으로부터 벗어나 생명과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참된 복은 무엇인가요? 상황과 주변사람들이 다 좋고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안정이 복이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 성도들은 저주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을 ‘복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빈궁에도 처하고 부유에도 처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한다면 그것이 참된 복을 받은 사람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핍박당하고, 박해당하고, 매 맞고, 목이 잘려죽는 것을 복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나를 본받아라, 나의 삶이 가장 축복되고, 풍성하며, 만족한 삶이기에 너희도 나처럼 살기를 원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축복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세상에 영향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그 영혼에 흘러넘치기에 상황과 사람에 관계없이 만족하고 기쁜 삶입니다. 우리 만족과 기쁨이 상황과 사람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늘 출렁이며 요동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힘든 것은 외부 사건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원인은 사람이나 상황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계속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중심이 예수님으로 인해 온전히 채워진다면 우리의 근원적 본질이 더욱 견고하고 풍요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통 중에 ‘목마르다’고 하셨더니 군병들이 신 포도주를 건넵니다. 29절입니다.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신 포도주는 싸구려 술로, 물과 포도주를 섞어 물 대신 마시던 고대의 음료수 였습니다. 군병들이 목을 축이기 위해 가져다놓은 것을 찍어서 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부하신 것으로, 본문과는 다른 장면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4절입니다.
마 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몰약이라는 마취 성분이 든 약을 타서 죄수들에게 줌으로, 십자가에서 잘 견디라는 의미로 포도주를 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고통을 그대로 다 담당하시고자 포도주를 거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마신 뒤 영혼이 떠나가십니다. 30절 말씀입니다.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무엇을 이루셨나요? 인간들이 담당해야 할 죄로 인한 결과인 목마름을 해결하시고, 예수 믿는 자에게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2010년도에 부탄이라는 나라는 국민 행복지수 1등을 하였는데 불과 7년 만에 97등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7년 사이에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세계의 멋진 집, 멋진 차, 멋진 음식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고 비참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1퍼센트 미만의 사람이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보지 않아서 비교하지 않고, 알지 않아서 부럽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온갖 명품의 정보가 인터넷과 유튜브에 공개됩니다.
우리도 다 목마릅니다. 이 세상의 목마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명수가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가를 맛보라고 하나님은 이 과정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목마르심으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신 유일한 분이심을 믿으실 때 여러분은 이 땅의 목마름에서 벗어나 하늘의 생명을 채움 받는 은혜를 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인가요?
2.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vv.31-37
두 번째로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인가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1절 말씀입니다.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유대인들이 율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악한 짓을 했는지 이 한 절에 드러납니다. 죄 없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사형수들을 빨리 죽이자고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채 팔이 늘어지면 어깨뼈와 가슴뼈가 폐를 누르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숨을 못 쉬면 참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팔을 끌어당겨, 조금이라도 숨을 쉬려고 합니다. 힘이 빠져 몸이 내려가면 숨을 못 쉬고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끈질긴지 고대 기록에 의하면 십자가 위에서 이 일을 일주일간 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반복하다 더 이상 그 힘이 없을 때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려면 ‘뭉치’라는 쇠몽둥이로 무릎을 치는 것입니다. 무릎이 부러지면 다리 힘으로 몸을 끌어 올리지 못해서 숨이 막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32절입니다.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두 강도에게는 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다리를 꺾었습니다. 그러나 33절에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이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신지 여섯 시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전날 밤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서 쓰러질 정도로 고통을 당하셨기에 여섯 시간 만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다리를 꺾지 않습니다. 대신에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34절에서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이 높은 곳에 매달려 계시기 때문에 군병이 밑에서 찌른 창이 예수님의 옆구리부터 심장을 뚫고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와 폐부분에 모여 있던 물이 같이 쏟아져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35절을 보시면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당시 예수님이 진짜 죽지 않았고, 잠깐 기절했다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장이 뚫려 피와 물을 보았다고 요한이 확실하게 증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36절과 37절입니다.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과정이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기록되었다는 구절이 반복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일이 하나님의 오랜 구원계획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구약의 모세 시대부터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미리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시도록 하셨습니다.
또 왜 예수님은 피를 흘리면서 죽임을 당하셨어야 하나요? 피를 통해서만 죄가 씻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피를 통해, 죽임을 당할 자가 구원을 얻는 유월절 어린양 이야기가 미리 기록된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 21절과 22절을 보시면
출 12:21-22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피로 인해 심판에서 구원받는 그림을 하나님이 수천 년 전의 유월절 사건을 통해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도 양의 뼈를 꺾지 말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입니다.
출 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뼈를 꺾지 않는 것은 ‘온전한 제물’로써 하나님께 바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피는 왜 필요한가요?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가치 있는 생명이 대신 바쳐져야 합니다. 유월절 때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신 장면이 출애굽기 12장 23절입니다.
출 12: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죄의 경중을 따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본질이 ‘하나님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에 모든 죄는 생명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다양한 모형과 상황을 통해 인간의 죄가 해결될 유일한 방법은 피를 통한 생명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피를 흘리심으로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심으로 우리를 살려 은혜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수천 년 동안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완성해내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예수 믿는 자의 인생에 개입하여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며 하나님 나라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실 때 여러분의 인생에 참 자유가 찾아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고통과 목마름에서 구원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