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6일 주일예배 설교문/ 김일승 목사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요한복음을 함께 배웠습니다. 우리는 본문 24절의 말씀처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요한이 기록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참되다는 확신 안에 한 구절도 빠짐없이 요한복음을 공부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훨씬 많았을 것이기에 2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녹취하고, 모든 기적을 기록했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이 모든 것을 재배열하지 않고는 오히려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 핵심되는 일곱 가지 기적, 일곱 가지 자기 선언 등 함축적인 것을 가져다 목적을 따라 기록한 것입니다. 그 목적을 20장 3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즉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가 풍성히 누리게 하려는, 또한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목적입니다. 본문 또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삶과 태도에 대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요?
1.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vv.18-19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요? 첫 번째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은 미래에 대한 예언처럼 베드로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사실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은 우리들 입장에서는 별로 받고 싶지 않은 말씀입니다. 인간은 다 자기 생각대로 살기 위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원하지 않는 데로 끌려간다는 것은 얼핏 저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도의 미래입니다. 단순히 교회만 왔다가는 사람이 아닌 참된 예수님의 제자에게 예수님은 동일한 요구를 하십니다. 그 핵심되는 말씀이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부인, 이것은 사실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일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은 채로 예수를 믿는다면 늘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분노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들은 다르겠지만 그것을 다 모아보면 또 보편성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유하기를 원하고, 사회적으로 능력을 인정 받기 원하며, 가정이 화목하고, 몸이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이 보편적인 것들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숙하기 전에 경제적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보다 돈을 의존하고 교만할 확률이 높습니다. 또 두 죄인이 만나 결혼했는데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부부는 성숙하게 서로 참아가며 맞춘다 해도 아이를 교육하고 양육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죄가 드러나며 거룩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자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자기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건강하지 못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한 번의 기도로 쉽게 이뤄지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건강하게 적게 먹고, 운동하는 지루하고 지난한 일을 계속 훈련해야 합니다.
이렇듯 보편적인 몇 영역 말고도 인간은 무한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의 이상과 하나님의 시각에는 큰 간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고 당장 필요한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미래를 알려 주시는데 그것이 베드로와 같은 미래라면 얼마나 충격적일까요? 심지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그의 삶뿐 아니라 죽음에 대한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19절입니다.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는 초대 교회에 엄청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박해가 심해지자 성도들이 종용하는 대로 로마를 떠나다 맞은 편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승에 전해집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한 질문이 영화로도 만들어진 ‘쿼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도망치니 내가 다시 죽기 위해 로마로 들어간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로마로 돌아와 붙잡혔으며, 자신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매달릴 수 없다고 하여 거꾸로 매달렸다고 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내가 드러나고 내가 편하고 행복한 것이 영광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약 70세에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베드로가 백세까지 살았다면 더 행복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땅의 하루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과, 주의 인도를 따라 생명까지도 내어놓게 되는 것. 우리도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당장 순교하거나 아프리카로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꿈에서부터 돌이켜 온전하고 자유로운 자리로 옮겨갈 수 있도록 개입하고 계신데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욕심과 두려움에 매여 고통하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 내가 계획하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이 가장 선한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요?
2. 타인이 아닌 자기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vv.20-23
두 번째로 구원받은 성도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요? 타인이 아닌 자기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며 베드로는 20절에 옆 사람을 보았습니다.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왜 요한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하나요? 요한이 베드로의 경쟁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같이 어부였고, 같이 열심이 있었고,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커서 세례 요한을 따라다녔고,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칭하자 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늘 일등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 사랑받고 공로와 헌신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포된 자신의 미래가 영 탐탁치 않은 것입니다. 만약 ‘최고가 되어 온 세상을 호령한다’라고 했다면 남의 미래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을텐데, 남이 원하는대로 끌려가는 미래가 너무 초라해 보이자, 자기와 같은 길을 걸은 친구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21절입니다.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우리는 멀리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 잘 사는 것에 낙심하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 나보다 조금 모자란 사람이 잘 되는 것에 요동합니다. 저 역시 나만큼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없이 사는 것, 나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생이 평탄한 것에 대해 ‘왜 나만?’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기에 베드로의 마음이 영혼 깊숙이 이해됩니다.
저와 친구는 비슷한 시기에 유학을 가서 비슷하게 돌아오며 십여 년을 붙어 살았습니다. 보스턴에서 텍사스로 이사하며, 같은 업체로 이사짐을 보냈는데 저희 차만 떨어져서 박살이 나고, 저희만 기차길 옆 기숙사에 배정이 되고, 저희 기숙사에만 쥐가 돌아다니고, 저희는 매달 백만 원씩 월세를 내는 동안 그 친구는 목돈이 있어서 집을 사서 환율 차이로 수천 만 원을 벌었습니다.
십년의 굽이굽이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정말 많이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다 지나고 돌아보니, 이 광야는 제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 내가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들이 처절하게 드러나고 깨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아마 제 욕망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저는 목회를 하며 갈등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늘사랑교회가 커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무서운 욕구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과정이 아니었다면 ‘기도 열심히 하셔야 하나님이 복 주십니다, 어려움이 있는 것은 잘못한 것이 있어서입니다’라고 기복과 율법을 떠나지 못한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내 열심에 반응하시지 않고 예수를 통해 하늘의 복을 이미 주셨음을 배웠기에 여러분에게도 복음만 전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컸던 것은 사명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은혜도 달랐습니다. 고통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사랑의 훈육이었습니다.
내 맘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이 비참한 인생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모든 것을 아시고 각 사람의 목적에 따라 적절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22절에 말씀하십니다.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남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고통이 많고 누구는 적어보여도 사람마다 분량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맞게 인도하시는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23절입니다.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사람들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소문을 냅니다. 그렇다고 순교 당하지 않은 요한의 인생이 베드로보다 행복했다고 할 수 있나요? 요한계시록 1장 9절입니다.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때가 A.D. 90년경입니다. 베드로는 67년경에 죽임을 당했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에 도미티안이 집권하면서 엄청 박해를 가하다 결국 예수님의 살아있는 마지막 제자 요한을 채석장에 유배시켜서 돌을 캐게 한 곳이 밧모입니다.
요한의 키워드가 환난과 나라와 참음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시록을 썼어야 했습니다. 도미티안의 박해를 견뎌내며 앞으로 임할 극심한 박해가 성도들을 어떻게 유혹하고 핍박할지 하나님이 영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을 기록할 사명에 따라 이 길이 허락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당하는 삶과, 90이 넘어서 채석장에서 돌 캐면서 매일 환난과 나라와 참음을 경험하는 삶.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나요? 서로 비교하여 누가 더 낫다라고 할 수 없는 삶입니다. 다른 사람 바라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고, 여러분의 모습과 영성대로 개입하셔서 가장 좋은 것,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